당일치기 여행이었다. 그러다 보니 그 오랜 세월 동안 쌓였던 서로의 이야기를 한꺼번에 풀어놓기엔 절대적으로 시간이 모자랐다. 나는 오늘 여정에 줄곧 내 애마의 신세를 지어야 했다. 그래서 형오와 술잔을 주고받을 수 없었던 것, 또한 아주 큰 아쉬움으로 남았다.
“준수야 내가 친구에게 잘할게.”
“이 사람아 죽마고우 사이에 무슨 그런 말을 하고 있어? 이제 서로 자주 연락하고 만나자고,재미있게 지내면 되는 것이지.”
우리는 길지 않았던 만남의 시간을 아쉬워하며 귀로에 올랐다. 우리의 중간 경유지인 대전역을 도착지로 네비에 설정했다. 내 본가에서 200여 미터 내외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우리의 모교는 여전히 자리 잡고 있었다. 운전석 옆쪽으로 정문 위쪽에 걸린 현수막이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왔다. 여전히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모교였다.
‘@@초등학교 102회 졸업식’을 알리고 있었다. 우리 51회 졸업생이 모교 교정을 나선 지 무려 51년을 넘어서고 있다는 것을 다시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나는 최근 커다란 클리어 파일에 고이 보관 중인 당시 초등학교 졸업장을 떠들어 보았다. 만 51년 3일째 되는 날이 졸업식날로 정해진 것이었다. 우리가 만나는 날을 이렇게 일부러 세팅하기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우리가 이렇게 만나기 몇 개월 전 형오는 이미 우리 고향 통합동창회에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전격적으로 합류했다. 우선 거액의 찬조금 쾌척부터 했다. 본인 부모님 두 분은 이미 타계를 한지 오래였고 두 딸도 결혼을 하여 따로 가정을 꾸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적지 않은 동창회 발전기금을 기꺼이 내놓다니 고마울 따름이었다.
무릇 경조사를 서로 챙긴다는 것은 우리나라 사회에선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 더구나 고향 친구 사이에는 더욱 그렇다. 아무리 품앗이라 하지만 모름지기 경조비를 주고받는 것이 정확히 자로 잰 듯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다시 말해 정확히 100 : 100의 비율로 주고받을 수 없는 것 또한 현실이다. 형오는 자신이 향후 동창회나 친구들로부터 경조비를 받을 수 있는 기회는 이미 모두 소진했음에도 이런 이해관계를 전혀 따지지 않고 이렇게 동창회에 큰 기여부터 하고 나섰다.
“준수야, 계좌번호 좀 알려달라고 했는데 왜 연락이 없어?” “에이, 무얼 온전히 내가 잘못해서 그런 건데 부담스럽기도 하고...”
지난번 형오를 만나던 날 대전역 인근에서 일어난 승용차 접촉사고와 관련하여 자동차보험료의 할증분 중 반 정도를 자신이 부담하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형오는 자신을 만나려고 서루르다 일어난 사고이니 그렇게 해야만 자신의 마음이 편하다고 덧붙였다. 전혀 뜻밖의 일이었고 참으로 난감했다. 그럼에도 나는 이를 못 이기는 척하고 내 계좌번호를 친구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참으로 염치없는 짓을 저지른 나였다.
“너무 고맙고 미안하이, 내가 이 신세는 살아가면서 갚도록 하겠네.” 나는 이런 기약할 수 없는 약속으로 형오에게 일방적인 신세를 지는 변명에 갈음했다.
“아니 그렇게 먼 곳에서 올라왔어? 친구는 정성도 대단하다.”
“난 초등학교 시절 춘호와 각별하게 가깝게 지냈어. 그러니 모친상을 모르는 척하고 지나가기는 개운치 않아서...
혹시 부담스러워할까 보아 준수 친구한테는 미리 연락을 하지 않고 올라왔네.”
서울의 대학병원에 마련된 춘호 모친 빈소를 찾아 그 먼 길을 마다하지 않았다. 부산에서 열차 편으로 인천에서 출발한 우리 일행보다 이미 몇 시간 전에 형오는 이곳에 도착했다. 지루한 시간 동안 다른 친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또 한 번 코끝이 찡해지는 순간이었다.
유난히 많은 친구들이 자주 모이는 우리 고향 통합동창회 봄맞이 축제가 이제 열흘도 채 남지 않았다. 이번 행사에 동참하기로 한 친구들의 숫자는 평년 대비 무려 1.5배에 이르렀다. 이엔 회장이나 총무의 역할이 절대적이었음은 물론이었다. 하지만 그다음 수훈 갑으로 나는 단연 형오를 꼽지 않을 수 없었다.
형오는 최근 같은 부락 친구들을 이 동창회에 엄청나게 많이 불러 모았다. 오랜 세월 이 모임에 참석은 물론 수소문이 되지 않던 친구들을 샅샅이 훑어 연락하고 설득한 결과였다. 80명 내외에서 횡보를 이어가던 동창 단체톡방 식구도 형오 덕분에 이제 처음으로 대망의 세 자릿수를 눈앞에 두고 있다.
51회 초등학교 동기생인 형오를 51년 만에 극적으로 상봉한 이 사건이 동창회에 하나의 발전적 기폭제가 될 것임을 나는 믿는다. 이제 초등학교 문을 나선 지 51년을 넘어 한 세기로 향하는 첫 출발점이 되길 기대해 본다. 이를 의심하는 친구는 어디에도 없었다.
“아니, 너희들은 여자도 아니면서 그런다니 참 이상하다.”
최근 형오와 내가 핸드폰을 한 번 들었다 하면 최소 한 시간 이상은 기본이라는 내 이야기를 전해 들은 여자 동기 수빈이의 한 마디 평이었다. 늦게서야 동창회에 합류하다 보니 형오는 그간 친구들의 근황이나 동창회 관련 그 많은 에피소드에 관해 나를 통해 그 궁금증을 풀고자 했다.그러니 이는 어쩌면 당연한 노릇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