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님 혹시 고향이 어디세요?” ‘난 충청북도 @@군 @@면 넘벌인데요. “ 이번에도 내 예상은 적중했다. 내가 평소 자주 들르는 포장마차에서 오늘도 3차 술자리를 마감하기로 했다. 이곳을 찾기 시작한 지도 벌써 6개월여를 넘어서고 있었다. 이 포장마차 여성 CEO가 자주 쓰는 사투리와 억양을 종합하여 추정컨대 우리와 같은 고향 출신일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였다.
우리와는 다른 초등학교 출신이었지만 우리 면과 인접한 행정구역 출신임이 밝혀졌다. 이래서 우리는 이 CEO를 앞으로 ”넘벌 누님“으로 부르기로 했다. 너른 들판의 뜻을 가진 고향 토속적인 지명이었다. 이웃 동네 옥천 출신 정지용의 '향수'란 시에 등장하는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에 버금가는 곳이었다. 누님은 고향을 떠나 서울로 올라온 지 강산이 몇 번이나 변했음에도 정겨운 우리 고향 토속어와 말투는 숨길 수가 없었다.
나는 초임 책임자인 대리 부임부터 서울의 강서지역인 영등포시장로터리 인근의 점포에서 오랜 기간 근무한 독특한 이력을 자랑했다. 내 직장생활의 1/3 정도 세월을 이곳에서 근무하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 사무실 인근의 음식점이나 주점은 내 손바닥 안의 손금이었다.
우리 점포의 인근엔 열 곳 너머의 포장마차가 성업 중이었다. 국철 지하철은 물론 시내외 버스 등 대중교통수단이 모두 골고루 갖추어져 있었다. 그래서 유동인구도 그 어느 곳보다 많았다. 3곳의 대형백화점도 자리 잡고 있는 덕분에 주말엔 쇼핑객들로 더욱 붐비는 곳이었다.
우리는 넘벌 누님이 개인적인 사정으로 쉬는 날을 제외하곤 다른 곳의 포차를 찾을 이유가 없었다. 이 누님은 그간 먹고살기 위해 산전수전을 다 겪었노라며 무용담을 수시로 꺼내 들려주었다.
이곳에 여성 CEO로 자리 잡기 약 2년 전의 일이었다. 그럴듯한 호프집을 꾸려보았으나 누적된 적자로 부득이 가게를 접은 적이 있었다. @@평형의 너른 공간의 영업장에다 간판도 번듯하게 내걸었다. 하지만 임차보증금에다 월세 인건비를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이러던 차에 오늘은 이곳 포차의 재무상황에 관해 살짝 귀띔해 달라는 내 부탁을 누님은 거절하지 못했다. 이곳은 도로 점용료 말곤 임차보증금이나 월세는 물론 종업원의 급여 부담이 전혀 없기 때문에 정말 ’ 알짜배기‘가게라며 나름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기도 했다.
당시는 2000년대 초반이었다. 식재료비, 전기요금, 도료점용료 등 제 비용을 떨어낸 후엔 자신은 매월 현금으로 600여만 원을 손에 쥘 수 있게 되었다. 금융기관에 근무 중인 나는 얼른 내 머릿속 계산기를 작동하기 시작했다. 연수입으로 환산하면 순수하게 7,200만 원의 연봉 인 셈이었다.자신의 소득을 깔끔하게 원천징수당하는 유리알 지갑이라 불리는 봉급생활자처럼 세전으로 따지자면 연 1억에 육박했다.
우리 일행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누님에 비하면 넥타이에 양복정장을 하고 매일 출근하는 급여생활자인 우리는 정말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했다. 전에 꾸려간 적이 있는 호프집과 지금 이곳 포차는 규모 등 외형은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영업익을 안겨주는 이른바 캐시카우 자리에 오른다는 것은 가게의 규모만을 가지고 따질 일이 절대로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