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님, 이 장판도 가져가실 수 있나요?”
“그것은 저희가 처리할 수가 없네요.”
약 열흘 전 창고를 가득 채운 짐을 정리하던 날이었다. 그동안 신수 단지 모시듯 해온 ‘신문스크랩 책자’를 고물상에 넘기던 때였다. 재활용할 수 있는 파지나 돈이 되는 품목 이외의 것은 철저히 외면을 당했다.
참으로 골칫덩어리였다. 쇠붙이 등 불연재와 함께 반 백 년 전 소금포대를 연상시키는 50리터들이 종량제 봉투에 담아 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머릿속을 퍼뜩 스치는 것이 있었다. 폐장판의 일부는 재활용도 가능할 듯했다. 역시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평상의 바닥을 교체하는데 쓰면 제격일 것 같았다.
작년 말 우량 공기업을 퇴사하여 나보다 좀 먼저 귀촌한 친구 인호는 오늘 오후 나의 새로운 보금자리로 선뜻 달려왔다. 이곳에 닻을 내린 후 인호는 약 30년이란 나이를 자랑하는 단층 슬라브 양옥집의 안팎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문제 해결에 나에게 지속적으로 도움을 주었다.
오늘은 내가 귀촌한 후 연착륙하는데 필요한 크고 작은 숙제들을 모아 한꺼번에 해결하는 날로 정했다. 친구 인호는 지금까지도 자신이 직장과 사회생활에서 얻은 지식과 지혜를 총동원하여 내가 모르거나 부족한 부분을 옹골차게 채워주곤 했다.
해결해야 할 숙제의 항목을 하나하나씩 미리 친구에게 알리는 것은 당연히 내 몫이었다. 그저께 광명에 사는 여동생으로부터 가져온 ‘온수 메트’의 설치가 첫 번째 미션이었다. 10여 년간 안방 터주대감 역할을 하던 전기장판을 건넌방으로 옮긴 후 이곳에 새로이 온수 메트를 설치했다. 물이 오가는 여러 개의 플라스틱 관의 연결부터 생수의 주입, 그리고 온도의 설정 등에 이르기까지 친구는 일사천리로 마무리했다. 인호는 아주 능숙한 손재주를 자랑했다. 이래서 이번 겨울 예상되는 강 추위에도 최소한 ‘동태’가 될 걱정은 내려놓아도 될 듯했다.
인호는 지난주 땅콩을 캐고 정리하는 작업을 하다 허리를 삐끗했다. 그래서 보행도 자유롭지 못했고 물건을 집어 들거나 옮기는 일은 더욱 어려웠다. 오늘 수행해야 하는 미션을 내가 제시할 테니 하는 일을 그저 지켜보며 조언만 해달라고 완곡하게 부탁을 했다.
직사각형의 길쭉한 평상의 리모델링에 관해 바닥재를 폐장판으로 새로이 새로이 갈아 끼우면 어떨까라는 나의 제안에 인호는 아주 좋은 아이디어라고 맞장구를 쳤다. 폐장판의 한쪽 끄트머리를 잡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인호는 자신이 허리가 불편한 환자임을 다시 한번 나에게 알렸다. 조언은 인호가 하되 팔다리를 움직이는 일은 오롯이 내 몫이었다. 약 30년이란 풍상을 겪어낸 평상 바닥의 장판은 손으로 쉽게 결대로 찢어졌다.
약 두 해전 이 보금자리 건물의 도배와 장판 교체 작업이 있었다. 본채에 딸린 각종 보물을 모두 모아 놓은 창고 한 귀퉁이에 둘둘 말아 두었던 폐장판을 재활용했다. 거실이나 방의 바닥재로선 이미 그 수명을 다했다. 하지만 평상의 바닥재로는 아직도 훌륭한 소재였다. 라인을 잘 가늠하여 잘라내고 네 곳의 모서리를 지철기 대신 날크립으로 깔끔하게 마감했다. 안성맞춤이었다. 한방에 업그레이드되었다. 제법 쓸만한 평상으로 새로이 탄생했다. 성인 남성 2명이 낮잠을 즐기거나 서너 명이 진영을 갖추어 술자리를 갖거나 고스톱 놀이도 충분히 가능한 이동 공간이 되었다. 군에서 배운 ‘미싱 하우스’ 방법을 응용하여 평상 바닥도 말끔히 물청소를 마쳤다.
오늘의 가장 큰 메인 미션은 기름보일러의 점검과 수리였다. 막내 동생 가족은 이번 한 여름 이곳을 휴가지로 잡았었다. ‘길치’ ‘기계치’라고 주위로부터 놀림을 받는 나와는 달리 동생은 기계에 관해 제법 많이 알고 다루는 솜씨도 수준급이다.
지난달 하순에 이곳에 짐을 풀자마자 나는 이 보일러 상태에 관해 동생에게 물었다. 고장으로 보이고 이제 수명을 다했으니 교체를 해야겠다는 의견을 냈다. 막내의 고향 절친은 이곳을 지키며 생업에 매진 중이었다. 이 분야의 일도 자신의 일거리 범주에 속했다. 그래서 내가 이 보일러를 점검해달라고 부탁을 한 지가 벌써 3주를 훌쩍 넘었다. 그럼에도 자신의 일정 때문에 아직도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결국은 내가 직접 나서는 수밖에 없었다. ‘현장 제일주의’라는 말이 떠올랐다.
이 건에도 인호의 지도를 따랐다. 보일러실로 같이 직행했다. 연료탱크는 바닥을 드러내기까지는 아직 제법 여유가 있었다. 이에 나의 아이디어도 보탰다. 먼저 일단 A/S센터로 문의를 했다. 뜻밖의 대꾸가 돌아왔다. 보일러는 고장이 아니고 정상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안방의 한쪽 벽에 붙어 있는 제어판을 직원이 알려주는 대로 여러 번 시험 조작을 마무리했다. 전원을 켠 상태에서 설정 온도를 30도 이상으로 바꾸고 목요 모드로 돌렸다. 그런 다음 5분 정도 후 따뜻한 물이 나오면 정상이라는 것이었다. 보일러 모듈의 부품 중 자동차 점화 플러그 유사한 부품을 뽑아서 시커먼 그을음을 닦아낸 후 다시 조립했다.
드디어 작은 기적이 일어났다. 보일러 상태는 극히 정상임이 밝혀졌다. 그동안 냉수로 세면이나 샤워를 했으니 이 기계치는 그에 합당한 대가를 치른 셈이었다. 기계가 정상인데 고장이라 잘 못 판단하여 A/S 직원을 출동시키면 최소한 출장비가 기본적으로 청구될 것이 분명했다. 그저 보일러를 구입한 지 오래되었다는 이유만으로 통째 교체해야 한다는 안이한 판단은 위험했다.
기름보일러가 제대로 작동되는 쾌적한 엔진 소리를 들으니 이 번 기회에 엄청난 업적을 남긴 것 같았다. 정말 뿌듯했다. 이 부문에도 인호의 코칭과 현장지도가 크게 공헌했음은 물론이었다. 온수 메트에 이어 보일러도 제대로 손을 보았으니 ‘그 해 겨울은 띠끗했네’라는 작품의 주인공이라도 된 듯했다. 그야말로 쾌적하고 따뜻한 겨울을 날 자신이 생겼다.
불연재료 전용 규격 쓰레기봉투 2개에 이미 해당 쓰레기를 나누어 담은 것은 오래전이었다. 평상의 리모델링에 성공한 후 남은 폐장판의 처리가 오늘의 마지막 미션이었다. 지금처럼 둘둘 말린 채로 봉투에 욱여넣는 것은 용량과 부피를 눈대중해 보아도 결코 쉽지 않을 듯했다.
온전히 인호의 도움만으로 오늘의 미션을 완수하였다는 말은 듣는 것은 부끄러웠다. 그래서 나는 순간 묘안이 없을까 고민했다. 문구용 커트 칼을 동원했다. 가로 세로 사이즈를 가늠하여 결대로 잘라내기로 했다. 칼날의 길이를 필요 이상으로 길게 내밀었다. 이 얇고 날카로운 금속은 청아한 소리를 내며 여러 번 부러지는 사고가 터졌다. 그때마다 새로이 칼날을 교체했다. 그런데 종전하고 무엇인가 달라졌다. 좀처럼 칼날이 말을 듣지 않았다. 잠시 멈춘 뒤 더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하나가 아닌 두 개의 칼날이 한꺼번에 장착되었던 것이었다. 기계치의 이름값을 여기서도 한껏 뽐냈다. 친구 인호에겐 이 해프닝을 비밀로 했다. 또 한 번 지청구를 들을 것이 뻔했다. 커트 칼을 교체 후 안전을 위하여 출입구를 막는 탈 부착이 가능한 아래 부분이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나는 왜 이렇게 덤벙대는지 참 창피했다.
여러 번의 폐장판 절단 작업을 이어가던 중간중간 가늠과 점검을 해보았다. 최종 목표의 달성이 가능해 보였다. 고지가 바로 앞에 있었다. 드디어 마지막 조각을 봉투의 나머지 빈 공간에 맞추어 채웠다. 그래서 마지막 퍼즐이 완성되었다. 그나마 체통을 세웠다. 50 리터들이 불연성 쓰레기봉투의 마지막 남은 공간을 최대한 활용했다. 봉투의 윗부분을 조여 묶었다. 아주 깔끔하고 빈틈없는 마무리였다.
오늘의 미션이 마무리되기 전에 인호는 자신의 애마를 몰아 금세 보금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친구를 다시 불러 냈다. 저녁식사를 하기엔 좀 이른 시각이었다. 오늘은 기념할 만한 날이었다. 귀촌 생활에 필요한 묵직하고 어려운 여러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하는 진도를 아주 많이 뽑은 역사적인 날이었다. 현직에 있을 때 특별 상여금을 받은 것처럼 오늘은 수지맞은 운수 좋은 날이었다.
이대로 오늘 저녁과 밤을 지내기엔 너무나 아까웠다. 그저 지나치기엔 2%가 부족했다. 나의 하얀색 아반떼 조수석에 인호를 앉혔다. 우리가 최근 새로이 개척한 맛집으로 휘파람을 불며 단숨에 내달렸다. 오늘따라 나의 고향 산천의 풍광은 빼어나다. 포장된 도로 양쪽으로 열병식을 하듯이 늘어선 가로수와 그 아래로 쉽게 한눈에 들어오는 비단강 물줄기는 나의 귀촌과 연착륙을 격하게 응원했다. 오늘 만찬 특식으로 정한 인삼어죽의 맛은 더욱 일품이었다. ‘뚜 두두 뚜두’ 가로수 잎사귀가 서로 부딪는 소리와 공간을 비집고 들어오는 뜸부기 울움 소리도 오늘따라 더욱 정겨웠다.
지식보다는 지혜란 것이 일상생활엔 더욱 필요하다. 기본 지식을 바탕으로 한 지혜에서 나오는 노하우 등이 매우 중요함을 오늘도 인호로부터 배웠다. 시너지 효과란 장단점이 서로 다른 사람 사이에 훨씬 그 위력을 발휘한다. 사무 관리직이었던 나와 달리 인호는 현장 경험이 아주 풍부한 기술자였으니 우리는 ‘환상의 복식조’로 합체도 어렵지 않을 듯했다.
“야 이 사람아, 이런 곳의 먼지는 매일 깨끗이 치워야 하는 거야. 오랜동안 비운 집이기 때문에 수시로 보일러를 돌려 천장이나 벽의 곰팡이도 없애고. 거실과 방문, 유리창 등을 모두 활짝 열어 햇빛도 쪼이고 맞바람을 이용해 충분히 환기도 시키고 말이야.”
오늘도 인호의 나에 대한 지청구가 이어졌다. 살림살이에 꼭 필요한 현장 지도를 인호는 오늘도 마다하지 않았다. 인호의 손에 들려 있는 미니 진공 손 청소기를 나는 얼른 빼앗아 바닥청소를 마저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