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은 언제 비참해지는가

내가 먼저 그들의 삶을 인정하고, 존중하겠습니다.

식사 자리를 정하던 날이었습니다. 은퇴하신 아버지께서 직접 식당에 전화를 거셨습니다.


“운영 하시나요? 저희 5명인데 자리 있을까요? 메뉴는 뭐가 있죠? 가장 많이 팔리는 거는 어떤게 있을까요? 그걸로 다섯 명 해주세요.”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알바생의 퉁명스러운 목소리에 저는 조마조마했습니다.


‘그냥 운영 여부만 확인하면 되는데… 메뉴는 검색하면 금방 보이는데…’


제 손은 스마트폰을 들썩거리고, 마음은 엉덩이처럼 들썩거립니다.


옆에서 아버지와 알바생의 대화를 엿들으며 저는 자꾸 아버지에게 참견을 합니다.


그러자 어머니가 조용히 말립니다.


“아버지가 이런 식으로 지금껏 우리 외식을 정해오셨어. 믿고 맡겨.”


순간 머릿속이 멍해졌습니다.


사실 대화는 저렇게 하는게 정석이었지,


어느샌가 대화에 예의와 격식은 사라지고, 서로의 필요만을 묻는 일이 많습니다.


말이 길어지면 오히려 짜증을 내죠.


저도 모르게, 너무 커져버린 제 머리 때문이었을까요.


가장이 되어 아이를 기다리고 있는 지금, 저는 어느새 제 방식을 고집하고 있었습니다.


은퇴한 아버지를 보는 눈


아버지는 은퇴하셨습니다. 저는 직장인이 되었습니다.


이제 아버지는 ‘일을 하지 않는 분’이 되셨고, 저는 ‘일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사회는, ‘나이 든 사람’을 쉽게 무시합니다.


요즘 교회를 다니며 그걸 더 자주 느낍니다.


연로하신 분들은 신경 쓰지 않으면 눈에 잘 띄지 않습니다.


그 반면에 젊은 사람들은 가만히 있어도 관심의 중심에 서곤 하죠.


어쩌면 아버지도 그렇게 관심 밖의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한때는 누구보다 든든한 기둥이었지만, 이제는 조용히 뒷자리에서 배려만 하시며 계십니다.


아버지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아이를 갖고 나서야 알게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세월이 얼마나 사람을 묵묵하게 만드는지, 부모가 되는 일이 어떤 무게인지를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동안 나는, 아버지를 얼마나 무시하고 있었을까요.


젊은 사람들과 대화하시는 아버지를 보며 괜스레 불안해하고,


착한 모습에 ‘호구 잡히는 건 아닐까’ 걱정하고,


일이 안 풀리면 “아버지도 좀 공부하셔야죠”라며 타박했던 건 아닐까요.


그래서 저는 아버지께 편지를 썼습니다.


“큰돈으로 효도는 못하지만, 아버지처럼 정직하고, 올곧게 사는 어른이 되고 싶다”고.


착하게 살면 호구다?


‘착하게 살면 호구다’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철렁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착한 사람이 사라져가는 건, 어쩌면 이 문장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도로 위에서는 양보하면 클락션이 울리고,


초보 운전자는 배려받지 못합니다.


끼어드는 사람들은 자신이 운전을 잘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이 끼어들 수 있었던 건 천천히 가던 차들이, 양보해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배려하며, 배려받고 살아갑니다.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배웠고,


착하게 살아온 아버지를 지켜보며 저는 이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착하게 살면 호구가 아니라, 복받는 삶입니다.

착한 사람을 이용하는 사람이 문제입니다.

세상이 조금 더 따뜻해지려면, 착한 사람을 응원하는 분위기부터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 시작은,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온 아버지 같은 사람을 다시 존중하는 것에서 시작될지 모릅니다.


이제는 제 아이에게 말해주고 싶습니다.


“착하게 살면, 잘 사는 거야.”


그게 아버지가 제게 가르쳐준 삶의 방식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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