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인가, 직업인인가를 묻는 어느 30대의 기록
어릴 적엔 직업에 대해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연구원은 연구하고, 음악가는 음악하고, 외교관은 외교하는 줄 알았다.
그게 전부였다.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도, 사회가 어떤 구조로 돌아가는지 몰랐다.
그저 좋은 대학에 가면 좋은 직업을 갖는다는 말만 들었다.
게임도 어영부영, 공부도 어영부영, 대학 진학도 그랬다.
군대를 다녀오고 나서야 ‘무슨 일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사가 되면 좋을 것 같아 약대를 준비했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래서 취업했다. 연구원이라는 직함이 좋았다.
학사 졸업생이지만, ‘연구원’이라는 이름을 달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내가 생각했던 연구와는 전혀 달랐다.
나는 지금 '연구'라기보다는 '솔루션'을 제공하는 사람에 가깝다.
내가 하는 일은 단순히 문제 해결이다.
그 문제가 ‘테스트 불량’이든, ‘원가 절감’이든, ‘공정 안정화’든 형태만 다를 뿐, 본질은 같다.
“문제를 찾고, 해결한다.”
문제는 계속 바뀌지만, 나라는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스프레드시트와 문서, 반복되는 회의와 레포트.
시간은 흐르는데, 내 머릿속은 점점 비워지는 기분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 일은 그렇게 어렵지도 않다.
그래서 더 무섭다.
‘이래서 다들 30년을 다니는구나.’
엄청난 역량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큰 기쁨이 있는 것도 아니다.
대기업이든 공무원이든, 모든 직장인이 겪는 ‘무색무취’의 하루들.
버티는 게 일이고, 일상이 곧 생존이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했고, 아이를 기다리고 있다.
당첨된 집은 프리미엄이 1억이나 붙었다.
30대 초반에 이 정도면, 겉으로 보기엔 부러운 인생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문득 멈춰 서게 되었다.
“나는 직장인인가, 직업인인가.”
그 질문이 스쳐 지나간 뒤,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나는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
이 일이 나에게, 그리고 사회에 어떤 의미를 주고 있는가?
회사를 떼어놓고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내 삶은 정말 나만의 것인가?
매일 아침 같은 시간에 출근하고, 같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같은 자리에 앉는다.
누군가는 이런 삶을 “루틴이 잘 잡혔다”고 말하겠지만,
나는 이 반복 속에서 나 자신이 점점 ‘무색무취’해지는 것을 느낀다.
화려하지도, 뚜렷하지도 않다.
맛도 없고, 향도 없다.
무언가 성취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무너진 것도 아니다.
그저 흘러가는 시간 위에 떠있는 느낌이다.
그리고 깨닫는다.
내가 잊고 있었던 건, 일의 본질보다 삶의 방향이었다는 것을.
문제는 ‘일이 나와 안 맞는다’는 게 아니다.
‘내가 무엇을 위해 일하고 있는지’가 불분명하다는 데 있다.
그저 살아가기 위한 수단으로 일을 하고 있지만,
그 과정에서 나라는 사람은 점점 희미해진다.
누구의 인생도 처음부터 색깔이 있지는 않다.
하지만 고민하고, 부딪히고, 자신만의 방향을 찾아갈 때
그 삶은 조금씩 ‘향’을 품기 시작한다.
지금 나는 그 향기를 찾아가는 중이다.
어쩌면 직장인에서, 진짜 직업인으로 넘어가기 위한 사춘기일지도 모르겠다.
무색무취의 인생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그건 아직 아무 색으로도 채색되지 않은 ‘캔버스’이기 때문이다.
이 캔버스를 어떻게 채워나갈지는 전적으로 나의 선택이다.
나는 여전히 답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묻기 시작했다.
“나는 어떤 색을 가진 사람이고 싶은가.”
그 질문을 멈추지 않는다면,
조금은 더 선명한 삶이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