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장 산업에서 발견하는 나의 가치
편의점에서 산 빵 하나를 떠올려보세요.
포장지를 벗기는 그 순간, 빵의 촉촉함과 향이 어떻게 유지되어 있는지 느껴본 적 있으신가요?
우리는 맛과 품질에는 민감하지만, 그 맛을 감싸는 포장에는 종종 무심합니다.
하지만 이 작은 차이가 일본과 한국 식품 산업의 경쟁력을 가르는 결정적 지점일 수 있습니다.
식품업계 현장에서 “포장까지도 제품의 일부”라고 믿는 일본과, “포장은 겉싸개 정도”라 여기는 한국의 간극은 생각보다 큽니다.
이 글에서는 두 나라의 식품 가공품 및 포장재 산업 구조, 소비자 인식 차이를 살펴보고, 포장 전문가로서의 정체성과 기회에 대해 저의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일본에서는 식품 포장 산업이 단순 부속품이 아닌 제품 완성의 핵심 산업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포장은 단지 음식물을 보호하는 것을 넘어, 제품의 일부로 여겨집니다.
이는 소비자가 포장 디자인과 품질에 기꺼이 비용을 지불하는 문화와 맞닿아 있습니다.
“좋은 포장은 곧 좋은 상품”이라는 인식이 강한 것이죠.
상품 가치로서의 포장: 일본 소비자는 포장의 아름다움과 정교함을 제품 가치의 일부로 받아들입니다. 예를 들어 백화점에서 판매하는 고급 과자나 과일 선물세트는 화려하고 세심한 포장으로 유명합니다. 이러한 포장 디자인과 완성도에 대한 높은 수용성이 형성되어 있어, 비싼 포장 비용도 당연하게 여겨지는 분위기입니다.
R&D에 대한 아낌없는 투자: 일본 포장업계는 기능성 필름, 산소·이산화탄소 조절 포장, 고차단성 소재 등 기술 R&D에 매우 활발합니다. 포장 재료 업체들은 식품의 신선도 유지, 향미 보존, 위생 개선을 위한 새로운 기술을 꾸준히 개발해왔습니다. 이러한 지속적인 혁신 노력 덕분에 일본의 포장재는 독자적 기술과 디자인으로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식품기업과 포장기업의 동반자 관계: 일본에서는 식품 제조사와 포장재 회사가 제품 기획 단계부터 협업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새로운 제품을 개발할 때 포장 전문가들이 함께 참여하여 가장 적합한 포장 솔루션을 설계합니다. 포장이 제품의 맛, 보존성, 브랜드 이미지에 미치는 영향을 잘 알기 때문에, 파트너로서 긴밀히 협력하는 구조가 정착되어 있습니다.
이런 문화 덕분에 일본 포장 기업들은 규모와 역량도 상당합니다. 2021년 일본의 포장산업 시장규모는 6조 1,477억 엔에 달하며, FP코퍼레이션 같은 대표 기업은 연 매출 2,000억 엔에 육박하는 거대 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다수의 전문 포장 기업들이 고유 기술로 경쟁하면서 시장을 이끌고 있죠. 일본의 편의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푸딩, 빵 포장 등이 세계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는 것도 이러한 산업 구조와 인식 덕분입니다.
반면 한국에서는 포장재가 아직 부차적인 하청 분야로 취급되는 경향이 강합니다.
식품업계에서 포장은 상품 기획의 핵심이기보다는 마지막에 고려하는 비용 요인으로 여겨지곤 합니다.
이는 가공식품이 일상적인 생계형 소비재로 자리잡은 역사와 맞물려 있습니다. 소비자들은 포장보다는 내용물과 가격 대비 양을 중시해왔고, 기업들도 포장에서 원가 절감을 우선시해왔습니다.
중소기업 중심의 산업 구조: 한국의 포장재 산업은 몇몇 대기업을 제외하면 대부분 중소기업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정부 정책상 포장재 제조업이 중소기업 적합업종으로 묶여 대기업 신규 진입이 제한되었던 적도 있어, 산업 구조가 영세하게 유지되었습니다. 그 결과 영세업체 간 단가 경쟁이 심화되어, 품질 혁신이나 설비 투자는 뒷전이 되는 악순환이 이어졌습니다. 실제 현장에서는 “무조건 싸게 만들어 달라”는 발주가 많다 보니, 포장재의 품질보다 가격에 초점이 맞춰져 왔습니다.
낮은 R&D 투자와 기술 혁신 부진: 산업 구조가 영세하다 보니 전반적인 기술 개발 투자도 미진했습니다. 새로운 포장 기술을 개발하거나 독창적 디자인을 만드는 경우가 드물고, 선진 기술을 해외(주로 일본)에서 들여와 모방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예를 들어, 한때 한국 편의점 삼각김밥의 포장 기술은 일본 특허를 로열티 내고 가져와 썼으며, 지금도 핵심 소재는 일본 수입에 의존하는 형편입니다. 이런 현실은 한국 포장 산업이 자생적 혁신 기반을 쌓지 못하고 정체된 이유 중 하나입니다.
식품사-포장사 협업 부족: 한국에서는 식품회사와 포장회사 간에 장기적인 협력 관계가 부족한 편입니다. 포장 개발이 제품 개발 초기부터 이루어지기보다는, 제품이 거의 완성된 후 포장 업체를 입찰로 선정하는 방식이 일반적입니다. 이 하청 위주의 거래 구조에서는 포장사가 창의적인 제안을 하거나 특수한 포장기술을 시도해볼 여지가 적습니다. 결과적으로 포장재는 ‘제작 의뢰를 받아 따라가는’ 역할에 머물고, 독자적인 기술이나 디자인을 축적하기 어려운 구조입니다.
물론 최근 들어 변화의 움직임도 있습니다. 일부 대형 식품업체들은 HMR(가정간편식) 열풍 등에 맞춰 포장의 기능성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산학 협력으로 고차단 필름, 친환경 소재 개발을 추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한국 포장 산업은 여전히 규모 면에서나 기술 수준 면에서 일본에 뒤처져 있고, 포장에 대한 소비자 기대치도 높지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
두 나라의 포장산업 규모와 구조를 데이터로 비교하면 그 차이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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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 규모: 앞서 언급했듯 일본 포장산업 제품 출하액은 2021년 기준 약 6조 1천억 엔(한화 약 60조 원) 규모에 달합니다. 이에 비해 한국의 포장산업 시장은 2017년 약 44조 원에서 꾸준히 성장하여 2020년 약 56조 원 규모로 추정됩니다. 규모 면에서는 한국도 결코 작지 않고 오히려 일본에 근접한 수준까지 커졌습니다. 다만 이 수치는 식품뿐 아니라 산업용, 물류용 포장 등 전체 시장 규모이며, 성장의 많은 부분이 편의성 식품 증가에 따른 식품포장 분야 확대 덕분이었습니다. 문제는 시장 구조와 질적 수준입니다. 일본은 이 거대한 시장을 소화하는 주체가 대형 전문기업들과 고도화된 협업망인 반면, 한국은 비슷한 시장을 수많은 중소업체들이 영세하게 분담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주요 기업과 산업 구조: 일본에는 에프피코(FP Corporation), 시피화성(CP Chemical), 리스팩(RISU Pack) 등 매출 수천억 원대의 포장 전문기업들이 다수 존재합니다. 이들 기업은 연구소와 디자인 부서를 두고 지속적으로 신제품을 개발하며, 식품 용기부터 고기능 필름까지 폭넓은 제품군을 가지고 있습니다. 반면 한국의 대표적 포장기업인 삼양패키징의 2024년 매출액은 약 4,481억 원 수준으로, 일본 선두 업체들과 비교해 규모가 한참 작습니다. 한국에는 아직 매출 1조 원 규모의 순수 포장 전문회사가 없는 실정입니다. 산업 인력 면에서도 일본은 대학에 포장공학 관련 학과가 있고 전문 인재 풀도 넓지만, 한국은 관련 학과가 드물고 산업 전반에 포장 전문성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정부 정책 및 지원: 일본 정부는 전통적으로 제조업의 세부 분야까지 산업표준 정립과 기술 개발 지원을 해왔습니다. 포장 분야도 예외가 아니어서, 일본포장기술협회 등의 단체를 통해 업계 표준화와 정보 교류가 활발합니다. 한국 정부도 최근 들어 친환경 포장 재질 등 규제와 지원을 강화하고 있지만, 한때 포장 제조업을 중소기업 보호 차원에서 묶어둔 정책은 양날의 검이 되었습니다. 작은 기업들을 보호했지만 결과적으로 대규모 투자를 통한 기술 혁신도 막힌 측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는 적합업종 제도가 개선되었으나, 여전히 대기업의 직접 진출보다는 중소기업 육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 산업 재편은 더딘 상황입니다.
이러한 구조적 차이는 결과적으로 제품 경쟁력의 격차로 이어집니다. 일본 편의점에 진열된 샌드위치나 빵은 맛뿐만 아니라 포장에서도 세심함이 느껴집니다.
빵의 향과 촉촉함을 유지하는 특수 코팅 필름, 산소를 차단해 신선도를 높이는 패키지 등으로 품질 유지에 만전을 기합니다.
반면 한국의 유사한 제품들은 내용물 자체의 개선과 함께 포장 기술 업그레이드가 따라주지 못하면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이 어렵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포장재의 한계는 식품 경쟁력의 한계”라는 말이 현장에서 나오는 이유입니다.
일본의 포장 고급화는 단순히 이론이나 데이터로만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생활 속 수많은 사례들이 이를 증명합니다. 특히 선물 문화와 맞물려 발전한 일본의 고급 포장은 한국과 뚜렷한 대비를 이룹니다.
일본 최고급 과일 전문점인 센비키야(千疋屋)의 과일 선물세트 예시입니다.
명품 브랜드와 협업한 한정판으로, 과일 한 상자에 수십만 원대 가격이 책정되지만 정성스러운 포장과 프리미엄 이미지로 많은 사랑을 받습니다.
일본에서는 오세이보(お歳暮), 오츄겐(お中元) 등 정기 선물 문화가 뿌리깊어, 포장이 화려하고 독창적인 고급 식품 선물이 크게 발전했습니다.
일본에서는 포장이 곧 선물의 얼굴입니다.
예를 들어, 센비키야 같은 고급 과일가게에서는 멜론 하나를 상자에 담아 정교하게 포장하여 1만7000엔(약 15만원)이 넘는 가격에 판매합니다.
계절 선물로 과일 바구니를 보내는 문화가 일반적이며, 이 바구니들은 3만엔(약 27만원)을 훌쩍 넘기도 합니다.
소비자들은 포장된 모습 자체에서 가치를 느끼고, “비싸더라도 품격 있는 포장”을 선호합니다.
이러한 소비자 인식 덕분에 기업들도 디자인과 소재에 공을 들인 포장을 선보이고, 이것이 다시 프리미엄 이미지로 이어지는 선순환이 있습니다.
한편, 한국에서도 명절 선물세트나 프리미엄 제품에 고급 포장을 도입하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대중적인 인식 면에서 “포장에 돈을 쓰는 건 낭비”라는 정서가 꽤 강한 편입니다.
예컨대, 몇 해 전 한 중소 과자회사에서 일본식으로 예쁜 틴케이스에 담은 고급 과자 세트를 출시했지만, 소비자들은 내용 대비 비싼 가격을 지적하며 아쉬워한 사례가 있습니다.
결국 포장 고급화는 시장 전체의 눈높이와 연결되는데, 일본은 그 눈높이가 높고, 한국은 상대적으로 실용성에 맞춰져 있었던 것입니다.
다만 한국도 변하고 있습니다. MZ세대 소비자를 중심으로 제품의 언박싱 경험을 중시하는 문화가 퍼지고 있습니다.
예쁜 패키지로 SNS에 공유하고 싶어하거나, 선물용으로 포장이 잘 된 제품을 찾는 수요가 늘고 있죠.
아직 일본만큼 대중화되지는 않았어도, 브랜딩을 위해 포장 디자인에 투자하는 국내 기업들이 점차 증가하는 추세입니다.
환경을 생각한 친환경 예쁘게 포장하기 같은 캠페인도 젊은 층 사이에서 호응을 얻고 있습니다.
이는 향후 한국 소비자들의 포장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질 가능성을 보여주며, 포장 고급화의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한국의 식품 산업은 최근 K-푸드 열풍을 타고 세계 시장에서 성장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2024년 9월말 기준 농식품(K-Food) 수출 누적액이 전년 대비 8.3% 증가한 73억 달러를 기록하여 역대 최고치를 경신했습니다.
라면, 과자, 떡볶이 등 가공식품이 해외에서 큰 인기를 끌면서 사상 최대 수출 실적을 이어가고 있죠.
이러한 흐름은 한국 식품기업들에게 엄청난 기회이지만, 동시에 새로운 도전을 던집니다.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하려면 맛과 가격뿐 아니라 포장, 브랜드, 스토리텔링까지 종합적인 완성도가 필수이기 때문입니다.
한국 식품이 해외 소비자들의 일상에 자리잡기 위해서는, 제품이 현지 유통 환경에서 신선하고 안전하게 유지되어야 하고, 현지 소비자들의 눈높이에 맞는 디자인과 편의성도 갖춰야 합니다.
이는 모두 포장 기술과 직결됩니다.
예컨대, 동남아나 중동으로 수출되는 한국 과자는 고온다습한 기후에서도 바삭함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하고, 미국 대형마트에 진열되는 소스 제품은 세련된 용기 디자인과 사용 편의성을 가져야 경쟁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한국이 이러한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면, “맛은 좋은데 포장이 별로다”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몇몇 수출기업들은 현지에서 포장 개선 요청을 받아 부랴부랴 리뉴얼을 한 사례도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은 포장 혁신에 투자해야 할 때입니다. 다행히 정부와 업계에서도 이를 인식하고 있습니다.
중소 포장업체들과 식품 대기업 간 상생 협력 모델을 만들어 기술 개발을 지원하거나, 해외 선진 포장기업과의 협업으로 기술 이전을 받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또한 환경규제로 인해 친환경 포장재 개발이 화두가 되면서, 새로운 소재와 디자인을 연구할 기회도 커지고 있습니다. 이는 자칫 뒤처질 뻔한 한국 포장 산업에 도약의 발판이 될 수 있습니다.
일본 역시 최근 플라스틱 폐기물 문제 등으로 친환경 포장에 집중하고 있으며, 2021년 조사에서는 일본 식품 관련 기업의 91.2%가 친환경 포장 도입에 관심을 보였다고 합니다.
한국도 이 분야만큼은 뒤늦게 출발했지만 빠르게 따라잡아 새로운 표준을 만들어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K-푸드의 매력은 분명합니다.
이제 그 매력을 완성해주는 포장이 따라줘야 합니다.
맛있는 음식을 만들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포장까지 포함한 하나의 경험으로 완성한다는 시각이 필요합니다.
세계 시장에서 한국 식품이 지속적으로 사랑받으려면, 포장재 기술력이 보이지 않는 힘으로 뒷받침되어야 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글을 마무리하며, 현업 포장 전문가의 한 사람으로서 느끼는 바를 전하고 싶습니다.
한때 한국에서 포장 일을 한다고 하면 “그냥 박스나 비닐 만드는 거야?”라는 식의 인식을 많이 접했습니다.
그러나 일본 출장길에 만난 포장 기술자들은 엔지니어이자 디자이너, 그리고 말 그대로 전문가로서 대접받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포장 하나에 기업의 철학과 소비자에 대한 배려를 담아내는 그들의 자세는 제게 큰 자극이 되었습니다.
한국에서 포장 분야의 구조적 한계를 논하지만, 저는 그 속에서 가능성도 보았습니다.
아직 개척되지 않은 영역이기에, 저처럼 식품과 포장을 두루 이해하는 사람이 목소리를 낼 공간이 많다는 뜻이니까요.
이제는 저 자신부터 포장 전문가로서 브랜딩을 해보려 합니다.
포장재를 단순히 납품하는 하청자가 아니라, 제품 가치를 높이는 파트너로 포지셔닝하는 것입니다.
브런치에 이 글을 쓰는 것도 그런 노력의 하나입니다.
포장의 중요성과 매력을 알리고, 제 자신을 브랜딩함으로써 업계의 변화를 이끌 작은 움직임을 시작해보고 싶었습니다.
“변화는 인식에서 시작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포장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일, 포장 전문가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일이 바로 제가 하고자 하는 일입니다.
일본을 무턱대고 부러워하거나 답습할 것이 아니라, 같은 눈높이에서 협력하고 경쟁할 수 있도록 우리의 산업과 문화, 그리고 우리 자신을 업그레이드해야 합니다.
포장재는 더 이상 제품을 감싸는 조연이 아니라, 제품을 빛나게 하는 주연임을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한국 식품과 포장 산업은 분명 구조적 한계를 안고 있지만, 동시에 변화의 가능성으로 가득합니다.
맛과 포장, 기술과 감성을 아우르는 전문가로 성장한다면, 그 가능성을 현실로 바꾸는 주역이 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