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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유팩이 재활용 안 된다고요?

종이와 종이팩의 차이, 그리고 멸균팩.

우유 한 팩을 집어 들 때, 우리는 그 포장지에 대해 얼마나 생각해봤을까.


종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지만, 그 구조를 뜯어보면 종이만으로 이뤄진 것은 아니다.

20211130053008104xzhc.jpg 기사"https://v.daum.net/v/20211130053003361?s=print_news"

특히 멸균팩은 더더욱 그렇다.


국내에서는 멸균팩이라 하면 자연스레 ‘테트라팩’을 떠올리는 이들이 많다.


종이와 플라스틱, 알루미늄이 켜켜이 쌓인 이 포장재는 상온에서도 음료나 액체 식품을 안정적으로 유통시킬 수 있는 강력한 기술력의 산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재활용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진다.


종이 같지 않은 종이팩


우리가 흔히 아는 종이류 포장재는 대부분 종이와 얇은 필름으로 구성된다.


겉에서 보면 단순해 보이지만, 구조를 보면 분명한 경계가 존재한다.


특히 멸균팩이나 종이팩은 일반 종이 포장재와는 명확하게 다르다.


이들은 보통 필름 + 종이 + 필름의 구조를 갖고 있다.


액체를 담기 위한 기능적 이유 때문이다.


포장 과정에서 종이가 젖으면 안 되니, 종이 자체에 방습 기능을 부여하는 것보다 겉면에 내수성 필름을 입히는 것이 일반적이다.


여기에 멸균이라는 특수한 기능이 더해지면, 알루미늄 층이 한 겹 더 들어간다.


문제는 바로 이 구조다.

스크린샷 2025-07-24 114622.png 기사"https://v.daum.net/v/20211130053003361?s=print_news"

재활용 공정에서 종이는 물에 풀리는 방식(침수)을 통해 재생된다.


하지만 필름이 양면을 감싸고 있다면?


종이는 물에 쉽게 녹지 못한다.


알루미늄이 추가된 구조라면?


금속 플레이크 혼입 위험이 생기고, 재활용 시설에서는 애초에 거부되거나 폐기물로 소각되기 일쑤다.


이로 인해 멸균팩의 국내 재활용율은 2% 내외로 알려져 있다.

스크린샷 2025-07-24 114328.png 기사*https://www.hankyung.com/article/202507096916i"

최근에는 한솔제지가 멸균팩의 재활용율을 높이는 설비를 70억 투자하여 사용하고 있다.


이제 시작 단계라는 것이다.


결국 종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어도 재활용 등급은 ‘어려움’을 받기 쉽고, ‘재질구조’ 중심으로 등급을 평가하는 국내 제도에서는 회수율 개선에도 한계가 있는 것이 현실이다.


알루미늄 없는 멸균팩, 가능할까?


이런 배경에서, 글로벌 기업인 SIG가 발표한 알루미늄 프리 멸균팩은 꽤 흥미롭다.

4de92c3d4b45e.png 출처: 올패키징

종이 비중을 80% 이상으로 끌어올리고, 얇은 고분자 필름만으로도 12개월 상온 보관이 가능한 완전 무균 유통을 가능케 했다는 점은 분명 기술적으로도, 정책적으로도 눈여겨볼 만한 변화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이 변화가 기존 설비를 그대로 사용해도 된다는 점이다.


생산성과 환경성,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다는 이점 덕분에, 해외 대형 유통사와 브랜드사들은 이미 상용화에 착수했다.


그러나 이 혁신이 의미 있는 이유는, 단순히 기술력이 높기 때문이 아니다.


포장 설계 단계에서부터 재활용과 탄소 중립을 함께 고민했다는 점, 그리고 그 고민이 시장과 제도 변화의 흐름을 감지한 결과라는 점에서 더욱 주목할 필요가 있다.


포장은 결국 '설계의 언어'다


포장지에 대한 논의는 때로 제품보다 소외되기 쉽지만, 사실 제품의 경험을 완성하는 데 있어 결코 부차적인 요소가 아니다.


특히 설계의 관점에서 본다면, 포장은 언제나 기능성과 지속가능성 사이에서 줄타기를 해온 분야다.


멸균팩의 내수성 구조가 왜 생겼는지, 왜 겉면에 필름을 덧대는지,


그리고 어떤 공정을 거쳐 재활용되거나 폐기되는지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 없이 무조건적인 비판이나 개선을 요구하는 것도 또 다른 단편적 접근일 수 있다.


중요한 건, 지금 우리가 어느 지점에 서 있는가이다.


SIG의 사례처럼, 기술과 제도의 접점을 고민하며 조금씩 구조를 바꿔나가는 설계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늘 ‘무엇이 지금보다 더 나은가’라는 질문이 있어야 한다.


필름을 덜 쓰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고, 종이를 많이 쓰는 것만이 친환경이 아닌 시대이기에.


국내 식품·포장 업계에 던지는 질문


포장재 구조가 바뀌면, 유통 시스템도, 재활용 흐름도, 소비자의 경험도 바뀐다. 그래서 더 어렵고, 그래서 더 도전할 가치가 있다.


이제는 단순히 테트라팩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알루미늄 없는 멸균이 가능한가, 기존 공정을 유지하면서도 재질구조 등급을 개선할 수 있는가,


실제로 시장과 브랜드사가 원하는 방향으로 기술을 제시할 수 있는가의 문제다.


국내 식품·포장 업계도 이런 변화에 더 깊은 시선과 상상력을 가져야 한다.


아래는 포장지를 종이로 교체하여 종이접기를 통해 홍보한 KitKat의 사례.

스크린샷 2025-07-24 115706.png 기사 "https://visla.kr/article/art/98295/"

https://www.youtube.com/watch?v=1-zci4hukCM


나 역시 이 업계에 몸담은 한 사람으로서,


단순히 내 전문 분야만이 아니라 식품의 특성과 소비자의 경험,


그리고 산업 흐름 전반을 연결지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포장은 결국 단순한 '껍데기'가 아니라, 생각의 총합이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더 나은 포장을 설계하는 상상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지금, 우리가 마주한 현실


한편 국내에서는 한솔제지를 중심으로 종이팩, 멸균팩의 재활용률을 높이기 위한 설비 투자와 기술 도입이 진행 중이다.


이는 분명 반가운 흐름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점을 직시해야 한다.


그것은 포장지의 구조 자체를 바꾸는 혁신에는 아직 주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SIG가 선택한 전략은 단순히 재활용 공정을 보완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재활용이 쉬운 구조’로 설계를 재정의한 것이다.


즉, 재활용의 출발점을 사후 처리에서 사전 설계로 옮긴 셈이다.


반면, 우리나라에서의 노력은 여전히 기존 구조에 대한 ‘보완’ 중심에 머물러 있다.


유럽의 종이팩과 멸균팩은 이미 수년 전부터 시설 투자로 인해 재활용 평가 등급에서 우수 판정을 받고 있었고,


많은 브랜드들이 그 흐름에 맞춰 패키징 전략을 조정해왔다.


반면 우리는 이제 막 재활용 가능한 인프라 구축을 시작한 단계에 있다.


그래서 속도가 느리고, 그래서 친환경 흐름에서 후발 주자로 평가받게 된다.


식품 산업의 글로벌화, 포장은 함께 가고 있는가?


한국의 가공식품은 지금, 세계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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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 품질, 기술력. 어느 하나 빠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 내용물의 외피인 포장에 대한 글로벌 시선은 아직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단지 외관의 화려함이 아니라, 지속 가능성과 구조의 설계라는 차원에서 보면 아직 갈 길이 멀다.


이 지점이 중요하다.


포장 업계만의 노력으로는 이 간극을 메우기 어렵다.


왜냐하면 포장 산업은 수요처인 식품·유통 업계의 방향에 종속될 수밖에 없는 중소 업종이기 때문이다.


수익성은 낮고, 이는 곧 장기적인 설비 투자와 독자적인 연구 개발이 어려운 환경이라는 뜻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명확하다.


잘 되고 있는 사례를 공부하고, 분석하고, 따라하는 것. 다소 소극적으로 들릴 수도 있지만,


오히려 이 전략이야말로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성과를 낼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접근일 수 있다.


설비가 곧 제품을 결정하는 현실 속에서


공산품, 특히 포장재와 같은 산업에서는 새로운 설비에서만 새로운 제품이 나온다.


이는 결코 바꿀 수 없는 명제다.


하지만 새로운 설비가 들어오기 어려운 업종이라면,


그 한계를 인정하면서 설계와 아이디어, 전략적 벤치마킹으로 그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거대한 도약이 아닐지도 모른다.


오히려 해외에서 먼저 성공한 모델들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나름의 방식으로 적용하는 시도들.




스크린샷 2025-07-24 115228.png 기발한 아이디어와 실행력으로 포장지를 활용한 방식

이런 움직임이 축적될 때, 언젠가 변화의 마중물이 되어줄 날이 올 것이다.


그 시점에 우리가 준비되어 있다면, 단순한 추종자가 아닌 주도적인 전환자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결국 포장은 기술이자 철학이다.


제품을 감싸는 물질이지만, 동시에 브랜드의 가치와 방향성을 드러내는 수단이다.


그리고 이 가치의 흐름은 이제 설계, 재료, 재활용, 탄소 중립 등 복합적인 기준 위에서 움직이고 있다.


우리는 지금 그 흐름의 갈림길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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