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살면서 엄마라는 그 이름 하 나로 소중하고, 따스하다. 내 가슴속에 그리움으로 남아있다. 나도 모르게 엄마께 죄송하고, 미안하고, 그래서 ''엄마의 한스럽고 답답했던 사연 많은 삶'' 늦었지만 내가 풀어 드리고자 엄마의 글을 쓴다. 물론 이 시대에 힘들고 고달프게 사신 분도 많겠지만, 엄마 가슴에 묻어두었던 이야기 지금은 먼 하늘나라로 떠나고 안 계신다. 그곳은 아프지도 않고, 천사의 날개옷을 입고 행복하게 아주아주 잘 지내고 계시리라 믿는다. 이승에서 삶은 너무도 고달프고 안쓰럽고, 가엽게 사셨으니 말이다. 여자의 일생 너무 맘이 아프다. 엄마의 "한스러운 삶" 어떻게 견디면서 살았을까. 아마도 자식 5남매가 있었기에 혼자 의지할 곳 없어도 버티고 사셨지 않았나 생각한다.
2편: 엄마의 삶
엄마는 아버지한테 처녀로 시집왔단다. 아버지는 큰엄마가 돌아가시고, 엄마와 결혼하셨다.
아버지는 10살 때 친척 집 양자로 들어와 결혼도 큰엄마랑 하셨지만, 큰엄마는 딸 둘 두고 돌아가셨단다.
그 후 엄마는 어린 나이 18세 처녀로 아버지한테 시집왔단다.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시집살이 시작이 된, 거라 하셨다. 내가 크면서 동네 아주머니께서 엄마 이야기 많이 해주셨다. 엄마는 조용하고, 얌전하고, 그랬다고 한다. 엄마는 아버지한테 시집와서 행복보다는 서럽게 사신 것 같다.
시집올 때 엄마는 이불도 안 해 왔다고, 할머니가 엄청나게 구박하고 이불도 안 주셨단다.
1.4 후퇴 때 압록강 건너 다리에서 보자 했다던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오지 않아 외삼촌은 엄마와 이모 데리고 먼저 오셨다고, 그 이후는 살아계신 지 돌아가셨는지 알 수가 없었단다.
이모가 한 분 있었는데 속아서 사기 결혼, 군인 출신이고, 유부남이었다고 이야기 들었다. 엄마가 의지할 곳은 여동생 한 분 이모는 자살하고 말았다. 엄마한테 잘살라고, 말 한마디 던지고 떠났단다. 엄마는 충격으로 정신이 이상해졌다 한다. 엄마가 힘든 집안일은 다 했단다.
엄마는 산으로 나무도 하러 다니시고 밤이면 할머니가 이불도 안 해왔다고 이불도 못 덮게 했다 한다. 믿기지 않는 이야기를 난 들었다.
3편: 우리 가족
난 7남매 중 막내다. 배다른 언니 두 분, 하고 엄마가 여섯을 출산하셨다. 내 위로 언니가 하나 있었는데 세 살 때 홍역 하다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의 나는 호적이 세 살 줄어있다. 나 또한 그리될까 봐 염려되었던 것 같다. 내가 초등학교 때는 너무 나이가 어려 철이 없었던 것 같다. 상수도가 집마다 들어오지 않아 개울물 지러 다가 밥도 하고, 개울가에서 빨래도 했다. 내 위로 언니가 밥을 하고, 개울에 가서 물을 떠 오고, 언니는 힘들게 엄마 대신 밥을 하고 학교도 다니면서 고생했다. 큰오빠는 군대 입대했고, 둘째 오빠는 서울에 있다고, 막내 오빠도 서울에 있다고 했다. 철없는 나는 떼만 쓰고 아무 일도 없듯이 지냈다. 마을은 중학교 다닐 때쯤 동네 버스도 다니고 산 고개 넘어 학교 가지 않아도 되었다. 내 바로 위 언니도 공부한다고 도시로 떠나고 없었다. 다만 큰오빠가 군에서 제대하고 집으로 왔다. 오빠가 우리랑 같이 산단다. 아버지도 아프시고, 엄마는 정신이 이상하고, 오빠가 부모님을 모신단다. 아버지는 기침을 심하게 하셨다. 걸음 걸을 때 지팡이를 집고 다녔으니 말이다. 아버지는 내가 중3 학년 때 하늘나라로 가셨다. 살면서 오빠는 결혼도 했고, 새언니가 생겼다. 난 너무 기뻤다. 난 학교 갔다 오면 청소를 깨끗하게 하고 마루도 반질반질하게 청소했었다. 오빠, 올케가 있어 난 맘이 놓였다.
엄마 이불 직접 그려준 선물
4편: 엄마의 이불
엄마는 시집올 때 이불 안 해왔다고 할머니한테 시집살이해서인지 한이 되셨나 보다.
엄마와 난 40살 차이 난다. 40살에 나를 '출산' 늦둥이다
엄마는 매일 도토리를 주우러 산으로 가셨다. 우리 집은 언제부터인지 마루와 마당에 도토리가 쌓이기 시작했다. 시장에 내다가 파신다. 정신이 이상한데도 하나에 꽂혀 이불에 집착하셨다.
엄마는 도토리 주워 파신 돈으로 모아서 알록달록한 이불을 사 오셨다. 사 온 이불은 차곡차곡 장롱 위에 쌓이기 시작했다. 사와 덮지도 않고 쌓아 놓기만 한다. 갈수록 해마다 가을이면 우리 집엔 도토리로 집안을 가득 메웠다.
엄마는 버스도 못 타신다. 시장 가려면 산을 넘어 4km 되는 곳을 걸어 다니신다.
2021년 8월 14일 산에 오르면서 엄마 생각나서 도토리 사진에 담았음
막내라고 그래도 난 이쁜지 도시락도 안 갖고 가면 들고 버스정류장까지 오고, 창피해서 숨고 싶었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너무 마음이 아파 눈물이 난다. 엄마한테 미안하고, 엄마 사랑해 ~~~
엄마의 이불은 건넌방, 골방, 이불로 천장까지 가득 찼다. 시골집이라 골방은 쥐들이 왔다 갔다 해 이불 다 쫓아놔서 망가져 버렸다. 그래도 엄마의 이불은 못 버린다. 집안이 뒤집어지니까 말이다. 색색이 고운 이불이 쌓이면 좋으신지 도토리와 이불은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5편: 엄마의 봄
엄마는 봄이 되자 이제는 논둑으로 다닌다. 쑥을 뜯으러 다닌다. 쑥을 뜯어 시장에 팔면 돈이 되면 이불을 또 사신다. 우리는 이제는 엄마의 ''한''이 서린 집착을 말리지 못했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고 안 했던가. 엄마는 쑥을 뜯어 시장에 팔고 이불도 사서 머리에 이고 산 고개 넘어 집으로 오셨다.
난 엄마를 도와주지 않았다. 창피하다고 느꼈으니 말이다. 시장에 많은 쑥을 갖고 가도 제값을 못 받고 파는 것 같았다. 말해보면 좀 이상하게 느끼니 제값을 쳐주지는 않았던 것 같다.
엄마는 그래도 당신이 했던 일들이라 쑥으로 쑥 개떡은 잘 만들어 줬다. 그때의 엄마가 만들어준 개떡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맛났다. 쌀가루 대신 밀가루를 넣어 만들어 줬어도 쫀득쫀득하고 맛있던 기억이 남는다. 그 어릴 적 엄마가 해준 쑥 개떡을 생각하면서 만들어 먹었지만, 엄마가 해줬던 그 맛이 아니다. 난 쌀가루를 넣어 더 나은 맛이라고 했지만, 엄마의 맛이 아니었다.
엄마의 쑥 개떡이 생각나 만들어 먹은 사진
6편: 엄마의 외로움
큰오빠, 올케언니도 시골을 떠나 도시로 가셨다.
엄마의 일상은 혼자서 시골에서 밥 해 드시고 봄이 되면 쑥, 가을이 되면 도토리 이불을 계속 사셨다.
안쓰럽고 가여운 엄마는 혼자서도 잘 살고 계셨다. 시골에는 아무도 참견하는 이가 없었으니, 이불만 쌓여가고 아까워 덮지도 않으셨다. 오래되어 먼지와 쥐들이 제집 드나들듯이 이불은 쥐똥, 쥐 털에 우린 시골 갈 때마다 엄마 모르게 하나씩 이불을 태웠다.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 엄마가 힘들게 모은 엄마의 재산이었다. 엄마는 연세가 드시고 가끔 아프긴 했지만 혼자서 도토리 줍고, 쑥 뜯어 이불 사는 낙으로 외로움을 달래고 사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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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편: 큰오빠의 시골 귀환
큰오빠는 우리나라 손꼽히는 대기업 주방장으로 일하고 계셨다. 그곳에서 일하시면서 몸이 안 좋으신지
그만두시고, 오빠만의 가게를 차리셨다. 산본 상가 사서 직접 운영하시다가 몸이 안 좋아 다 정리하고 엄마가 계신 시골로 간단다. 다행이다. 엄마의 외로움이 덜하겠다고 생각했다.
시골 땅이 있어 새로운 집을 짓고 내려가신단다. 오빠는 다른 곳보다는 고향이 좋겠다고 엄마도 계시고,
오빠의 병은 간경화란다. 복수에 물이 차서 물이 차면 빼야 한단다. 시골에 새로운 집도 지었다. 엄마도 같이 살자 해도 옛날 집에서 사신다고 한다. 오빠는 시골에서 집 짓고 좋은 공기 마시면서 병이 날 거라고 했지만 현실하고 달았다. 시골 일손이 바쁘면 가서 도와주고 그리하셨나 보다.
8편 : 오빠는 하늘나라
시골에서 한 3년이나 사셨나 남의 일손 도와주다 쓰러지셨다고 한다. 시골집에서 병원은 안 가고 누워있단다. 난 시골로 내려가면서 시장에 들러 과일 좀 사고 이것저것 샀다. 과일가게 아주머니가 많이 샀다고 사과 하나를 덤으로 주셨다. 맛이나 보란다. 집으로 가려운전대를 돌려 달렸다. 오빠가 나쁘지 않았으면 하는 맘으로 내 차는 시골길을 달려 한 삼십 분 뒤 고향 집에 도착했다. 집에 들어가 현관문을 열고 보니 거실에는 큰오빠가 누워있었다. 머리맡에는 누룽지를 끓여줬나 보다 통통 불어있는 누룽지가 있었다.
사 온 과일 중 아줌마가 준 사과 하나를 깎아 주란다. 그걸 먹더니 잘 먹었다고 한다. 심각해 보여 난 막내 오빠한테 전화했다. 병원으로 가야 한다고 하지만 오빠는 괜찮다 한다. 막내 오빠랑 통화하면서 큰오빠는 우시고 계셨다. 마지막이라 생각하셨나 보다. 난 위급하면 119 불러 병원 가신다 소리 듣고 안양으로 왔다. 얼마 안 돼서 오빠는 심해 119 불러 대천병원에 있다고 다시 병원에 갔을 때는 이미 혼수상태였다. 아무도 몰라보고 말씀도 없다. 막내 오빠랑 이 내려와 큰오빠 다니시던 한림대 병원으로 모시고 왔다.
이미 오빠는 혼수상태로 깨어나지 않고, 59세 나이로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나셨다. 너무 고생만 하고 떠났다. 오빠와 올케 사이는 자식이 없었다. 우리 형제들이 상주가 되어 오빠를 하늘나라로 보내드렸다.
장례를 마치고 집에 왔더니 엄마가 오빠가 집에 오지 않는 걸 느끼셨는지 나중에 대성통곡하셨단다. 오빠 죽음을 엄마한테 알리지 않았으니 말이다.
9편: 두 여인
큰오빠가 떠나고 시골을 다시 엄마와 올케만 남았다.
두 분이 시골 계셨지만, 올케는 농사를 짓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엄마는 노쇠해지고 힘도 없으시고 아프셨다. 막내 오빠가 모신 다해 내가 시골 내려가서 내 차로 엄마를 모시고 올라와 왔다. 엄마는 생전 처음 타보는 차라 올라올 때 멀미가 심해 토하고, 힘들어하셨다.
막내 오빠, 막내 올케가 고생하시겠다 난 너무 감사했다. 부모님을 모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난 안다. 엄마는 오빠 집에 계시면서 맛난 것도 언니들이 사들이고 도시의 구경은 하셨다. 멀미로 인해 장거리 가는 건 엄두도 못 낸다. 엄마는 기뻐하면서도 시골에 가고 싶어 했다. 이불도 궁금하지 않았을까. 그토록 애지중지 여겼던 걸 잠시만 계시면 시골 모시고 간다고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엄마는 시골에 올라온 후는 모셔다 드리지 않았다. 시골은 큰 올케 혼자만 남게 되었다.
10편 : 엄마의 도시
어느덧 엄마는 이곳 환경에 적응하셨는지 시골 가는 걸 포기하시고, 오빠집에서 잘 지내고 계셨다.
오빠, 올케 보살핌 속에서 맛있는 것도 드시면서 말이다. 엄마는 고기를 드시지 못한다. 하지만 생전 드시지 않았던 고기 피자도 드시고. 엄마는 부침개라고 하셨단다. 맛있다고, 가끔 내 바로 언니가 맛난 것도 사드리고 난 엄마한테 별로 해드린 것은 없다. 내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오빠 언니들이 계시니 믿고 그랬던 것 같다. 가까운 데는 차도 타시고 엄마가 좋아하는 바지락 칼국수도 드시러 다녔다.
나의 시골집은 담쟁이넝쿨로 뒤덮여 있었는데 그 위로 호박 넝쿨이 쭉 뻗어 애호박이 열면 바다에 가서 캐 왔던 바지락 넣고 애호박 넣어 칼국수를 끓여 먹었다. 엄마는 그래서인지 칼국수를 잘 드셨다.
집하고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바닷가가 있었다.
엄마는 자유로운 영혼으로 새가 되어 날아다닐 것 같아서 ~~~~~
11편: 엄마의 먼 여행
엄마는 오빠 집에서 잘 지내시다 미끄러지셔 엉덩이 골반뼈를 다치셨다. 연세도 있으시고, 병원도 가는 걸 싫어하신다. 병원에서 약이랑 타와 노인이다 보니 입원하셔도 힘들다 해 오빠, 올케언니는 환자용 침대를 대여해 집에서 대소변을 받아 내셨다. 엄마는 갈수록 야위어 가시고 하루하루가 달라지셨다. 올케언니가 엄마 모시고 계셔 고생하고 계셨다. 식사도 못 하시고 죽을 드셔야 했으니 말이다. 이런 엄마를 계속 모셔서인지 막내 올케는 어깨 아파 수술해야 하는 상황이 생겼다. 엄마는 삼 년 동안 누워 계시다가 할 수 없이 요양병원으로 모셨다. 3개월 후 엄마는 요양병원어서 눈을 감으셨다. 의사 선생님께서 힘들다고 가족들 연락해 와서 갔을 때는 숨을 몰아쉬고 계셨다. 가여운 엄마는 우리 곁을 떠나셨다. 엄마는 향년 90세 2015년 음력 6월 5일 11시 15분, 돌아가셨다. 아버지, 큰오빠 일찍 잃은 딸 곁으로 가셨다. 엄마는 꽃가마를 타고 시집오신 것도 아니었다. 부모도 안 계셨으니 말이다.
난 엄마를 위해 상조 보험을 미리 들어 두었다. 살아생전 꽃가마는 타시지 못한 엄마 저 멀리 가시는 엄마를 리무진으로 모시고 싶었다.
사랑하는 엄마는 화장해 공원묘지에 안장되셨다. 엄마 안장되실 때 만 원짜리 한 장을 접어 넣어 드렸다. 저승길 가시다가 칼국수라도 사드시고 가시라 하는 맘으로 했다.
산에서 도토리도 주우시고, 쑥도 뜯으시고, 엄마가 좋아하시는 거 하시라고 엄마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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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그리운 엄마의 추억, 발자취
엄마가 더욱더 생각날 때면 봄이 오면 쑥을 보면 생각나고, 가을 되면 도토리 보면 엄마가 더욱더 그립고 생각난다. 도토리 몇 알을 주워 호주머니에 넣고 만지작만지작 그랬던 적도 많다. 엄마가 가시고 엄마의 이불도 같이 우리 가족 곁을 떠났다. 나랑 같이 글 쓰시는 작가님도 엄마 꽃신을 그리면서 신고 가라는 시를 쓰신다.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그리움이 더 쌓여만 간다. "엄마"
나도 언젠가부터 엄마가 좋아했던 이불 보면 사고 싶다. 우리 엄마를 위해 그런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편히 하늘나라 계세요. 이다음 다시 만나면 건강한 모습으로 엄마를 보고 싶다. 사랑하는 엄마를 위해 이 글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