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고 낭만적인 지성의 도시
"우리 내일 출국이지, 엄마?"
"응. 오늘은 하이델베르크라는 도시에 갈 거야. 여기서 저녁 먹고 호텔 와서 짐 싸면, 내일 오후 비행기로 떠나는 거지."
"내일은 뭐 해?"
"호텔에서 아침 먹고 프랑크푸르트 시내에서 간단히 쇼핑하자. 특히 약국은 꼭 들러야 해. 선물도 좀 사야 하고."
"아, 쇼핑 귀찮은데..."
"친구들 사다 주고 싶은 건 없어?"
"하리보 젤리? 근데 그거 서울에도 다 있잖아. 그냥 서울 가서 사면 돼."
"왜, 서울 가야 한다니 슬퍼?"
"슬프지, 그럼. 서울은 지금 엄청 푹푹 찐다던데. 돌아가면 나 또 그 찜통더위에 학원 다녀야 하잖아."
"하하, 그래도 돌아가서 이틀은 쉴 수 있잖아. 이번엔 시차 적응하라고 엄마가 이틀 풀로 빼놨다?"
"네~에 감사합니다요. 그래도 내일 돌아가야 한다니 왠지 좀 꿀꿀해지네."
"그러게. 시간 참 빠르다. 인천에서 뮌헨 오는 비행기에서 내내 독일 여행 가이드북만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다 못 보고 가는 것 같아 아쉬워. 독일은 진짜 여러 번 와야 할 것 같아.. 근데 이제 중학교 1학년 1학기 자유학기제도 끝났는데... 앞으로 이렇게 해외여행 올 수 있으려나?"
"아니, 엄마! 공부도 좋지만 쉴 땐 쉬어야죠. 사람이 어떻게 맨날 공부만 하고 살아요?"
딸의 당찬 한마디에 웃음이 터졌다.
우리는 ICE를 타고 하이델베르크로 향했다.
마르크트 광장에서 푸니쿨라를 타고 하이델베르크 성에 올랐다. 성의 테라스에서 내려다보는 붉은 지붕의 구시가지와 유유히 흐르는 네카어강의 풍경은 한 폭의 그림이었다. 우리는 거대한 와인통 앞에서 사진을 찍고, 중세 시대 약국의 모습을 간직한 독일 약학 박물관도 가볍게 둘러보았다.
광장으로 내려와 독일식 돈까스인 슈니첼로 점심을 먹었다. 작년 오스트리아 여행에서도 실컷 먹었던 익숙한 맛이었다. 점심 후에는 카를 테오도어 다리의 원숭이 동상 코를 만지며 소원을 빌고,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학생 감옥과 도서관을 구경했다. 학생 감옥의 낡은 벽에 가득한 낙서를 보며 딸아이가 불쑥 말했다.
"이런 거 우리 학교에도 있었으면 좋겠다! 맨날 사고 치는 남자애들, 하루 종일 여기다 가둬두면 딱 좋겠네!"
"얘, 요새 그랬다간 난리 나. 학부모님들이 가만히 계시겠니?"
"그래도 우리 쌤, 남자애들 때문에 너무 힘들어하신단 말이야. 뭔가 저런 건 학교에 있어야 해."
원래는 해 질 녘에 오르려 했지만, 호텔에 일찍 돌아가 짐을 싸야 했던 우리는 조금 서둘러 철학자의 길로 향했다. 카를 테오도어 다리를 건너 가파른 '뱀의 길'을 오르자, 딸이 덥고 힘들다며 툴툴거렸다.
"아니, 여행 마지막 날 코스가 등산이냐고요오~"
가쁜 숨을 몰아쉬며 길의 중턱에 다다랐을 때, 딸의 투덜거림이 멎었다. 언덕 너머로 보이는 하이델베르크 성과 구시가지의 풍경은 고된 걸음을 보상하고도 남을 만큼 아름다웠다.
"그래, 고생은 했지만 올 만했네."
우리는 그 풍경을 마음에 담으며 천천히 언덕을 내려왔다.
"여기가 괴테, 헤겔, 야스퍼스 같은 철학자들이 즐겨 걷던 길이래. 그래서 이름이 '철학자의 길'이야."
"아, 저번에 갔던 괴테 하우스의 그 할아버지! 헤겔이랑 야스퍼스는 처음 들어보는데. 근데 철학자들이 뭐 하는 사람들이야? 그냥 생각 많이 하는 사람들?"
"음, 보통 수준에서 생각 많이 하는 건 잡생각이겠지. 철학자들은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해.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모든 것에 '왜?'라고 묻고, 그 답을 찾으려고 평생을 바친 사람들."
"괴테 할아버지는 무슨 '왜?'를 생각했는데?"
"엄마도 다 아는 건 아니지만, 괴테 할아버지는 평생에 걸쳐 『파우스트』라는 책을 썼어. 내용이 꽤 흥미로워. 평생 공부만 하던 파우스트 박사가, 세상의 모든 지식과 쾌락을 직접 경험해보기 위해 악마한테 영혼을 팔겠다고 계약을 하거든."
"오, 그건 좀 흥미로운데?"
"응. 파우스트는 악마의 힘으로 사랑, 쾌락, 권력, 부, 심지어 신화 속 미인과의 사랑까지 모든 걸 경험해. 하지만 결국 그 모든 게 덧없다는 걸 깨닫지. 그러다 마지막에 이르러 진정한 만족을 주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그 덕분에 구원을 받아. 왜 구원받는지는 스포일러가 되니 이 정도만 얘기해 줄게."
"어... 왠지 지루할 것 같아."
"하하, 그럴지도. 근데 옛날 사람들한테는 이 이야기가 주는 메시지가 아주 신선했나 봐. 그때의 일반적인 사고방식을 뛰어넘는, 아주 새로운 가치를 보여줬거든."
나는 잠시 숨을 고르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위대한 철학자들은 뭐랄까, 한 시대의 당연함을 의심하고 새로운 관점을 보여주는 사람들이야. 그리고 그 관점들이 다가올 시대의 생각의 틀을 마련하는 거지. '앞으로 올 미래는 이렇게 이해해봐라!' 하고 길을 터주는 거야."
"음... 어려운데."
"예를 들어, 요새 가장 큰 화두가 AI잖아. '이제 AI가 사람을 대신해 모든 일을 할 것이다'라고 가정한다면, 우리에겐 '그럼 인간은 앞으로 뭘 하며 살아야 하지?'라는 질문이 남게 돼. 이 질문을 깊게 파고들어, 기존의 틀을 깨는 답을 제시해서 다음 세대가 나아갈 방향을 가리키는 사람이 바로 위대한 철학자인 거지."
딸아이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피식 웃었다.
"...AI는 그냥 내 친구인데."
"엄마한테는 재미있는 학습 파트너이기도 해."
"엄마도 별생각 없네. 우리는 위대한 철학자는 못 되겠다, 그치?"
"응, 위대한 철학자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지. 나중에 네가 한번 도전해 보든가."
"아냐, 싫어. 난 그냥 AI랑 친구 할래."
"그래, 그럼."
어느새 우리는 구시가지로 들어와 있었다.
"우리 프랑크푸르트 돌아가기 전에 시간 좀 있으니, 블랙 포레스트 케이크 한 조각만 더 먹고 가자. 이 동네 대표 케이크는 이 동네에 있을 때 먹어야지."
"아! 엄마가 '바덴... 뭐더라?' 하고 어렵지 않게 외웠던 거기?"
"응, 바덴뷔르템베르크! ㅂㅂㅂ!! 입에 착착 붙지 않니?"
우리는 깔깔대며 콘디토라이(Konditorei)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달콤한 냄새가 독일 여행의 추억으로 남는 순간이었다.
(독일 편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