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머리로는 이해하는데, 가슴은 왜 놓아주지 않을까

by 해피엔딩

며칠 전, 복도에서 한 동료 선생님을 두 번 마주쳤다. 인사는 분명히 하셨는데, 고개는 다른 쪽을 향한 채였다. 나는 순간 마음속에서 셋으로 갈라진 생각을 했다.

1. 인사가 어색해서 그런 걸까?
2. 그날따라 컨디션이 좋지 않았던 걸까?
3. 혹시 나한테 화난 게 있나?

곰곰이 따져보니 1, 2번일 가능성이 훨씬 크고, 3번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화날 일이 있을 리도 없고, 설사 있어도 그렇게 대놓고 드러낼 분도 아니니까. 머리로는 이미 결론을 낸 셈이다.

그런데 마음은 여전히 붙잡고 있었다. 내가 웃으며 인사했으니, 상대도 웃어야 공평하지 않은가? 나도 환영받고 싶다는, 일종의 ‘예쁨 받고 싶은 마음’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데 그 마음을 더듬어 가다 보니, 그것은 결국 상대를 내 뜻대로 움직이고 싶다는 욕심과 다르지 않았다. 법륜스님은 그런 마음을 ‘독재’라고 표현하셨다. 상대가 나를 향해 웃든 말든, 그것은 그 사람의 자유라는 뜻일 것이다.

비슷한 경험은 회의 자리에서도 일어났다. 계원이 회의 공문을 올렸는데, 회의 시간은 고작 10분. 형식적이긴 해도 회의는 회의인데, 조금 빠듯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하지만 그 결과를 토대로 오늘까지 자료를 내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그럴 수도 있지’ 하며 결재했다. 그런데 협조자로 들어가 있던 한 부장 선생님은 “회의가 10분으로 되겠냐”며 불편해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답답함이 올라왔다.

‘부장 선생님도 급하면 그렇게 하실 텐데, 왜 이해를 못해주실까?’
나는 이해했는데, 왜 저 사람은 이해하지 못하는 걸까. 머리로는 “모르니까 하는 소리지.” 하고 정리하면서도, 가슴은 여전히 답답해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두 사건의 뿌리는 같았다. ‘내가 이해했으니 너도 이해해줘야 한다.’ ‘내가 웃었으니 너도 웃어야 한다.’ 나의 기준과 상대의 반응이 어긋나는 순간, 가슴속에서 불공평하다는 감각이 올라온다. 그것이 답답함과 억울함의 정체였다.

머리로는 이미 다 알고 있다. 사람마다 성격이 다르고, 상황마다 반응이 다르다는 걸.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고, 성의 없는 인사가 그 사람의 전부는 아니라는 걸. 그러나 가슴은 다르다. 공정과 상호성을 원하는 마음, 나도 존중받고 싶다는 마음이 자리하고 있다.

결국 내려놓기란, 상대를 바꾸려는 마음을 접는 일일 것이다. ‘나는 내 방식대로 따뜻하게 했으니 그걸로 됐다.’ ‘저 사람은 저 사람의 자유대로 반응하는 거다.’ 이렇게 선을 그어주는 것.

머리의 이해와 가슴의 요구 사이에서 답답해하는 순간들. 아마도 그것이 인간관계에서 끝없이 배우고 또 연습해야 하는 과제가 아닐까 싶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나는 나, 너는 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