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은 미친 짓이다

Beijng Blues

by Lady Spider

# Beijing Blues

아버지께서 2012년 2월에 돌아가시고 나서 한동안은 내 선택 때문에 아버지께서 더 일찍 돌아가셨다는 생각에 견딜 수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왜 세상은 나에게 늘 어려운 숙제만을 줄까? 궁금하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에 유리알 천국의 유효기간이 끝났고, 중국 베이징으로 연수 장소를 옮겼다. 당시 연수가 영어권 1년, 제2외국어권 1년으로 나누어 실시되는 방식이었다.

베이징에 도착하자 뿌옇고 매캐한 공기가 날 반겨주었다. 그곳에서 먼저 연수를 시작한 회사 선배들은 오리목 구이와 카이란, 얼궈토우(우리로 치면 참이슬 같은 서민 고량주)로 나를 환영해 주었다. 중국음식을 좋아하긴 하지만 오리 목 이라니. 하긴 중국에서는 아리따운 아가씨들도 오리 목 하나 들고 열심히 뜯어먹는 장면을 여러 번 목격하긴 했었다.


새로운 환경은 아버지를 잃었다는 사실조차 가물거리게 했다. 중국 집주인, 택시기사, 대학 행정조교 등과 대화해서 내가 원하는 상태를 쟁취하려면 그들처럼 강하고 시끄러운 성조로 따져 물어야 했다.


몰랐는데, 원래 상실이란 게 그랬던 것이었다. 평소에는 잊고 지내지만, 늘 마음 한 편에 웅크리고 있는, 히키코모리 같은 놈이었다. 잘 지내다가다고 어느 순간 어떠한 계기가 마련되면 반갑다는 듯이 나를 휘청거리게 만들었다.


나는 일단 이 상실감과 그리움을 술로 풀었다. 다행히 어머니를 닮아서 술을 좋아하고 회복도 빨랐다. 갓 삼십된 젊은 아가씨가 공산당 체제의 수도에서 술을 만땅으로 마시고 밤거리를 횡보하는 모습이란. 연수비 아낀답시고 구입한 2G 폰을 몇 개나 해 먹었는지 모른다. 그때의 나는 정박하지 못하고 떠다니는 배, 폭풍우에 뿌리 뽑힌 나무처럼 그렇게 "부유"하고 다녔다.


# 결혼은 미친 짓이다

옛날에 "결혼은 미친 짓이다"라는 영화가 있었다.영화 내용은 자세히 기억나지 않지만 파격적인 제목만큼은 기가 막히다. 나는 원래 이 영화 제목처럼 "결혼은 미친 짓"이라고 생각하는 독신주의자였다. 아버지와 결혼해서 평생을 고생하시는 어머니처럼 되고 싶지 않았고, 엘리자베스 여왕 1세처럼 잔 다르크처럼 나라를 위해 대의를 위해 싸우는 여성이 되려면 결혼은 되려 짐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물론 버지니아 울프도 출판사 사장인 남편의 도움을 받았었고, 마리 퀴리도 동료 화학자인 남편의 도움을 많이 받았었지만, 그것은 지극히 운이 좋았을 때의 사례라고 생각했다.


사유리 같은 케이스가 있기도 전에 나는 결혼은 안 하고 애만 낳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영원을 추구하는 인간 본능 때문에, 내가 죽고도 남을 나의 흔적의 의미로. 나는 아버지 돌아가시고 앞으로의 인생에 더 깊이 생각해보고 결혼을 안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그 동안 미국 시차를 견디고 용케 나를 계속 사귀어 주었던 남자친구에게 이별을 통보했다.


그랬던 내가 어떻게 "착각 결혼"을 하게 되었을까. 너무 큰 반전이 2012년 9월에서 2013년 3월 사이단 6개월만에 일어났다. 다양한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겠지만 이 책에서는 나의 결혼과 이혼에 대한 이야기는 아끼고, 다음 책에서 자세히 풀어나가고자 한다. 핵심만 요약하자면, 행복한 결혼에 대한 "이미지"가 전혀 없던 내가, 아버지를 잃은 상실을 메꾸어보고자, 사회가 나에게 주는 숙제를 다 완수해보고자 하는 방법으로서 결혼을 선택했던 것이고, 그것은 순전한 착각이었다는 것이다.


남편(이 될 사람)은 베이징 칭화대에서 석사 과정을 하고 있던 유학생이었다. 서울대 동문이었고, 나와는 전혀 다른 배경의, 부모님 두 분 다 박사학위이고, 아버지가 대학교수이고, 식구들 대부분이 서울대나 이화여대를 나온, 그런 사람이었다. 가족 중에 서울대를 갔다고 외계인 취급을 받는 나와는 매우 달랐다. 장학금을 받기 위해 4년 반 만에 졸업을 해버린 나와 달리 남편은 로스쿨 준비를 한답시고 군대 기간까지 합치면 8년간 대학을 다녔다.


이 사람과 베이징에서 알게 된 지 3개월 만에 사귀었고, 그 후 3개월 만에 결혼했다. 결혼에 대한 로망 자체가 없었던 나는 오히려 사무적으로 결혼을 대했기 때문에 결혼 "의식"과 관련된 일련의 모든 결정들을 쿨하게 할 수 있었다. 시어머니께서 베이징까지 오셔서 시어머니, 나, 남편과 한 호텔방에서 묵으면서 결혼 날짜, 식장, 웨딩드레스, 청첩장에 대해서 의논했는데 나는 무조건 효율성에 초점을 두어서 개방적이고 유연한 결정을 내렸다. 여성들이 가지고 있던 "웨딩드레스"에 대한 감수성도 없었기에 나보다 1년 먼저 결혼한 시누가 갔다는 샵에서 하자는 어머니 말씀에 흔쾌히 알았다고 했다.

그때의 시어머니께서 하신 말씀이 아직도 생각난다. "너는 그냥 서울대 나오고 고시 붙은 거야. 나머지 너네 아빠 아프시고 이런 거는 다 "공구리"치는 거야" 난 "공구리"라는 말을 원래 몰랐는데 아마도 "콘크리트"라는 말의 한국식 발음 같았고 콘크리트로 묻듯이 내 출신과 과거를 묻어라 이런 뜻으로 알아들었었다.


그렇게 많은 것을 불공평한 구조(남편 + 시어머니 vs. 나)의 협상을 통해 졸속 결정을 내려버리고는 서울에 계신 어머니께 말씀드렸다. 외교관으로서의 미션이었다면 아주 심각한 참패이다. 어머니는 늘 나와 나의 선택을 믿으셨기에, 아마도 자퇴까지 스스로 결정하는 딸을 설득해 봤자 말을 듣지 않으리라는 것을 아셨기에,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그전에는 한 번도 상상해 보지 않았던 결혼이라는 것을 진짜 하는구나 할 때, 나는 내 머리 위로 달랑거리던 아버지에 대한 상실과 그리움, 막막함, 불안함이 사라지기를 기대했다. 당연히 너무나 큰 착각이었다. 그것은 뭐든 내 감정과 희망에 관계없이 사회가 요구하는 숙제를 완료할 수 있을 것이라는 오만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삼십의 나이에 나를 셀프 땡처리 했다. 그러면서 늦게라도 팔아서 다행이다, 남들은 소개팅도 하고 미팅도 하고 선도 보고 해서 어렵게 하는 것을 나는 되게 쉽게 해냈구나 하고 스스로 좋아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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