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다음 작품을 위해 말을 아끼겠다. 그러면서도 과정에 과정은 연결 지어야 한다. 13.3월 갑작스러운 결혼 후 다음 해 출산이라는 숙제까지 마쳤다. 사실 아이 낳기 전 이미 내가 한 선택이 잘 못 되었다는 느낌은 받았었지만, 남들 하는 숙제는 꾸역꾸역 하는 것이 내가 태어나 프로그램된 방식이었다. 그 너머는 볼 수가 없었다.
"82년생 김지영"이라는 영화는 공무원으로서 출산 후 경력 공백 문제에 큰 여파가 없는 나와 사정이 많이 다르지만, 그래도 대한민국에서 정규 교육을 받고 결혼이란 것을 택한 사람으로서 공감 가는 부분이 있었다. 특히, 이미 여성상위시대를 구현한 우리 집에서 내가 여성이라는 것도 잘 인지하지 못하고 자라난 나는 결혼하고 나서야 비로소 내가 대한민국 여성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내가 노오력으로 획득한 사회적 지위나 지적 수준으로는 바꿀 수 없는 구조라는 것도 함께 알게 되었다.
결혼 후 남편은 중국 대학 석사과정이 아직 남아있어 베이징 체류를 더 해야 했지만 나는 본부 업무에 복귀하여 남편 없는 시댁에 홀로 2년 10개월이나 살았다. 이것 역시 오만에 기반한 오판이었다. 난 사회생활도 잘하고 맷집이 세니까 시댁생활도 사회생활인 것처럼 하면 돼. 시아버지는 국장님이고 시어머니는 심의관님이야, 하면서. 결혼 후 첫 해 명절날 나는 남자들은 커다란 네모진 상에서 차려준 밥을 먹고, 여성들은 그 숫자가 비슷한데도 엄청 좁은 동그라미 상에 다리를 쪼그리고 밥을 먹는 모습을 보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소녀 파브르 특유의 호기심으로 저명한 인류학자 마가렛 미드가 된 마냥, 머랄까 새로운 사회문화를 탐구하는 마음으로 매 순간 임했다.
처음엔 나도 나름 노력했다. 남편 생일날 9첩 반상도 차려보고 시부모 여행도 보내드려 보고, 제삿날이나 명절 전날 오후 반차 내고 고사리도 다듬어 봤다. 애 백일상, 돌상 다 내가 손수 만들어서 집에서 했다. 남편이 미국 박사 준비한다길래 오랜 번역 알바 경험을 살려 SOP도 첨삭해 주었다. 하지만 시댁의 문화, 특히 남편의 마인드와 나 사이의 간격은 좁혀질 수가 없었고, 특히 남편이 그것을 폭언이나 폭력으로 표출하면서 나는 더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결혼한 지 2년 만에 이혼소송을 걸었는데 남편은 서면입장에 나 보고 "왜곡된 페미니즘"이라고 했다.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나는 남성성과 여성성이 각자의 장점을 존중받아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내가 사회에서 하는 행태를 페미니스트들이 본다면 나에게 돌을 던질지도 모를 정도로 나는 남성 권력의 세계에 나를 껴맞추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하는, 어쩌면 "남성의 가면"을 쓴 여성이다. 그런데 페미니즘이라니. 시몬 드 보부아르가 무덤에서 웃을 일이다.
마지막, 나와 남편은 롯데리아 햄버거를 씹으며 정전협상을 했다. 마지막으로 물었다. 너의 가족 개념이 뭐냐. 남편은 자기 부모님, 그 밑에 자기, 자기 여동생, 자기 남동생, 그리고 나와 내 딸이라고 했다. 나는 가족은 우리 부부와 내 딸이라고 했다. 벽에다 얘기하는 것 같았다.
# 잃어버린 10년, 그리고 나의 왼쪽 귀
이혼 소송을 걸고 나는 바로 아이를 데리고 베이징 공관으로 파견 나왔다. 그리고 홀로 아이를 데리고 워킹맘 생활을 했다. 어쩌면 어릴 적 예산제약선보다 더 많아진 제약 선들 아래서 나의 목적함수도 하나 아닌 둘로, 나와 내 딸을 위한 것으로 바뀌었고, 그 사이에서 저글링 하는 쳇바퀴 같은 삶을 살았다. 베이징 근무 1년이 좀 지나자 나는 아이가 아직 어리고, 우리 부부 동거기간이 길지 않아 더 지켜봐야 한다는 "진단"? 같은 말도 안 되는 기각 판결을 받았다. 그때 나는 포기했다(포기해서는 안되었다). 그냥 나는 '남편' '애아빠'라는 빈칸에 누구나 들어가 있어도 된다는 식으로 자포자기하기 시작했다. 내 회사, 내 회사가 마련해 준 주거에 남편이 무임승차해도 그러려니 했다. 내 회사만 건드리지 않으면 된다.라는 생각. 그래서 그런지 나는 더욱더 워커홀릭, 알코홀릭처럼 살았다.
한 번은 선배가 물었다. 너는 왜 이렇게 목숨 걸고 열일하냐. 나는 "외교부라는 조직이 너무 감사하고, 조직이 없었다면 지금의 저도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했다. 그만큼 가정에서의 상처를 조직에서의 인정과 성공이 덮어줄 거라 생각했다. 한쪽 다리가 썩어 들어가도 자르지 않은 채 계속 절름발이로 걷다 보면 희망이 있을 거라 믿었다.
그러다가 2018년 봄 어느 날 남편도 나도 취한 채로 있었을 때 남편이 나의 왼뺨-목 언저리를 세게 쳤다. 그때 갑자기 바람소리가 휘익 휘익 나더니 그때부터 왼쪽에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일이 너무 많아서 한 달은 왼쪽 귀에 소리가 들리지 않은 채 살았고, 이후 귀국하여 왼쪽 귀 고막 재생 수술을 했다. 하지만 아직도 휘익 휘익 이명소리가 나고, 전화 수화기를 왼쪽 귀에 대면 잘 안 들릴 때가 있다. 그렇게 고흐처럼 나는 왼쪽 귀의 정상 청력을 잃었다. 고흐는 아예 귀를 잘라 냈으니까 나는 그나마 더 나은 것이겠지만.
# 모든 것을 흘려보내다
놀랍게도 2018년의 일이 일어난 후에도 나는 이혼 소송을 걸지 않았다. 공안에 신고도 했었어야 했는데, 그때 그 순간마저도 나는 온통 업무 생각뿐이었다. 2019년에는 베이징 근무를 마치고 바로 미얀마 양곤으로 임지를 바꾸었다. 남편은 아직 박사공부가 남아있으니 이제 떼어낼 수 있겠다 싶었는데, 미얀마에서 심각한 워커홀릭 상사를 만나, 이 분을 모시고 일을 하려다 보니 나와 보모 둘만으로는 도저히 아이 케어가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잘못된 판단을 했다. 나에게 주어진 좁디좁은 선택지 안에서 또 오답을 냈다. 나는 어차피 남편이 박사공부하면서 양육비도 안 보내주고 그냥 나 일만 많이 하는 애 버리는 년이라고 욕할 거면 차라리 그러한 남편을 활용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해서 남편과 또 6개월을 미얀마에서 생활을 했는데 이것이야 말로 이중 생지옥이었다. 일터에서는 극악무도한 워커홀릭 상사에 집에서는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의심하고 집착하며 나를 깎아내리기만 하는 남편이 있었다.
문제는 남편 자체라기보다 남편에 대한 나의 마음이었는데, 당시 나는 그 사람의 목소리만 들어도 피부만 스쳐도 소름이 끼치고 샤워를 수십 번 할 정도로 "혐오"라는 감정에 시달렸다. 똬리를 튼 뱀을 마주하는 만큼이나 두렵고 괴로웠다.
남편이 자기네 집안이 무슨 총선을 나가야 한다며 2020년 2월에 서울로 돌아갔는데 그 이후 코로나가 터지면서 나는 또 홀로 아이와 남았다. 미얀마 양곤은 그렇다 할 병원 시스템도 없이 그저 아이가 코로나에 걸리지 않기를 바라면서, 또 일은 일대로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너무 힘들 때쯤 미얀마 정부의 내 카운터파트가 명상을 해보는 게 어떠냐 했다.
미얀마는 소승불교의 유래지로 "위빠사나 명상"이 유명하다. 위빠사나 명상은 코끝의 들숨과 날숨에 의식을 집중하여 "멈추고"나서 떠오르는 모든 것들을 강물에 흘려보내는 명상이다. 그리고 나를 아껴주셨던 상사가 추천해 준 "금강경"을 읽었는데, 정말 큰 위로가 되었다.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모든 상은 죄다 허망하니, 만약 모든 상이 상이 아님을 깨달을 때 바로 여래를 본다)" "응무소주 이생기심(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라)"하는 말은 딱히 종교가 없던 나에게도 정말 큰 위안이 되어 주었다. 나는 금강경을 두세 번 필사하면서 모든 것을 흘려보내기 위해 애썼다.
이렇듯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상실감을 해소하기 위해 급하게 내린 결정은 그만큼 아주 큰 무게감을 지니고 있었다. 이 실패는 앞서 내가 이루었던 명문대 입학이나 고시 합격과 같은 성공을 다 의미없게 만들 정도로 더 중대하고 심각한 것이었다. 편찮으신 아버지로 인한 예산 제약선과는 차원이 다른 정도로 다양하진 제약 선들 속에서 더 커진 역할과 책임감, 엄마 역할과 조직에 대한 충성, 그 사이 균형을 맞추기 위해 내가 하는 모든 노오력에 대해서 쏟아지는 평가들. 특히 남편에게 들었던 "애 버리는 년" 소리.
그래도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한 발짝 더 디딜 틈조차 없는 낭떠러지 앞에서 나는 다행스럽게 명상을 알게 되었고, 여러 책을 읽으면서 삶에 대해 깊이 묻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상"이라면, 그 "상"은 "허상"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이 모든 것이 나의 "의미부여"의 결과라면. 그렇다면 나는 이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을 자유가 있다. 틈새를 열면 조금씩 벌어진다. 하나의 문을 열면 그 다음 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