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열리고, 세계가 무너지다

자기만의 세계(metamorphosis)

by Lady Spider

# 하늘이 열리고, 세계가 무너지다

그렇게 난 미얀마에서 마음의 바닥에 닿고 나서 그 바닥이 없음을 알게 되었다. 마치 땅끝마을에 서서 끝이 없음을, 끝과 동시에 시작임을 알게 되는 것처럼. 2021년 2월에 본부에 복귀해서 난 더 이상 "노오력"이라는 것을 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억지로라도 내버려 두기로. 그리고 이혼 소송을 다시 걸었다. 남편이 이혼 소송을 걸면 또 회사에 소문을 낸다는 둥 협박을 했지만, 그래도 상관이 없었다. 이제를 썩을 대로 썩은 상처를 도려내야 한다. 그래야 새살이 돋을 테니까.


2021년 가을 무렵에 박사 학위도 시작했고 우연히 요가도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안전지대"에서 벗어나기 위한 날갯짓을 연습하기 시작했다. 어떤 것에든 마음이 1초 이상 머무르지 않게, 그리고 거기서 다시 마음이 생기게. 요가, 명상, 그리고 분야를 넘나드는 독서. 마치 갈증을 채우듯 읽어 나갔다. 논문이든 무엇이든. 조직 안에서 사다리 타고 올라가는 것은 버렸다.


그러다가 작년 여름 어머니께서 아버지 유골을 납골당에 더 이상 모시기가 어려우시다며, 지금은 좋으신 분을 다시 만나 지내고 계신데, 그냥 아버지를 하늘에 보내드리고 싶다고 하셨다. 그렇지. 아버지가 나와는 그래도 편찮으시기 전에 개구리 잡던 추억이 있겠지만, 어머니와 동생에게는 오로지 괴로움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나는 동의했다. 그리고 그 여유와 용기가 10월 무렵이 되어서야 찾아왔다. 딱 개천절 날 다음에 하늘이 열리고 난 다음날, 우리 가족은 새벽부터 결연한 표정으로 동해바다로 향했다.

여느 때와 다르지 않은 가을 바다였다. 그날따라 파도가 거세 보였던 것 같기도 하고, 해가 빨리 지는 것 같기도 했다. 하늘이 열려서 어딘가에 아버지께서 들어가실 문이 열려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재가 되어 버린 아버지의 유골을 바다에 뿌려드렸다. 바로 그때 어깨에 힘이 풀리더니, 나와 세계 사이를 항상 가로막고 있었던 것 같은 얇고 투명한 막이 찢어지는 것을 느꼈다. 결계가 풀리는 느낌. 내가 만든 제약선 속에서 선택을 하고 선택이 만든 집에서 또 선택을 하던 그러한 끝없는 미로에서 빠져나오는 느낌이었다. 나도 모르게 외투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핸드폰을 바다에 빠트렸다. 아버지께서 아쉬움에 하늘에서도 쓰려고 그랬던 것 같다. 하나도 아깝지가 않고 아쉽지가 않았다. 그때 그 가을 밤바다 공기에서 이상하게 온기가 느껴졌다.


# 자기만의 세계

버지니아 울프는 영문학도인 내가 정말 좋아했던 작가이다. 졸업논문도 버지니아 울프의 두 작품을 비교했었던 것 같다. 대학 때 "자기만의 방(Room of one's own)"이라는 그녀의 짧은 에세이를 읽었던 기억이 난다. 여성이 주체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돈과 자기만의 방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핵심 주장이었다. "여러분에게 돈을 벌고 자기만의 방을 가지라고 하는 것은, 리얼리티에 직면해서 활기찬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버지니아 울프의 외모는 가냘프고 힘이 없어 보이는데 그녀의 문장에는 단단한 힘이 있었다.



21세기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여성 남성 관계없이) 자기만의 방을 갖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지 못한다. 어릴 적 부모님, 선생님, 친구들에게 은연중에 들은 목소리들을 넘어설 수 없는 율법처럼 부여잡고 단단한 관념의 철창을 만들고 있다.


나 역시 제약선이라는 개념을 만들고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았지만 좀 더 도전적이고 좀 더 개성 있는 삶의 양태를 띨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아버지의 질병으로 인한 힘든 상황을 때로는 족쇄처럼 때로는 왕관처럼 여겼다.


잃어버린 10년 속에서 헤매면서, 질문에 질문을 던지면서 어렴풋이나마 알게 된 것은 관념은 강철보다 단단하다는 것이며, 그 관념의 철창 안에서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가두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것이 사실 "no matter"한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면 그 강철은 그 순간 힘을 잃어버리고 구름처럼 스르르 사라져 버린다는 것을.


자, 이제 빨간 약을 먹을 것인가, 파란 약을 먹을 것인가. 나는 초현실적이면서도 지극히 현실적인 길을 택하였다.


그날, 하늘이 열리고 아버지를 보내드리면서 내 세계도 붕괴해 버렸다. 그 붕괴는 애도할 것이 아니라 축복하고 환영할 일이다. 이제 나는 절름발이인 채로 미로를 헤매지 않는다. 그렇게 내 안에 안전지대라고 할 모든 관념들을 함께 불태워 버렸다.


아담은 흙으로 빚어져 신의 숨결을 물려받았지만, 이브는 아담의 갈비뼈를 물려받아 태어났지만, 나는 신의 숨결도 아담의 갈비뼈도 없이 지켜야 할 그 어떤 유산도 없이 파도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리고 다짐했다. 매일 세포가 죽고 재생되듯이 나 외부의 모든 것들도 바꾸어 가겠다고. 계속 내 자신도 진화해 가면서 내 세계도 변화시키는 메타모포시스(metamorphosis)의 삶을 택하기로. 그렇게 "자기만의 방"을 넘어서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겠다는 생각의 씨앗을 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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