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게임의 끝판왕
나는 게임을 잘 안 하고, 못 하는 편이지만 어릴 적 슈퍼마리오와 보글보글(악당들에게 거품을 쏴서 거품 안에 가뒀다가 그 거품을 터뜨리면 악당이 죽음)은 끝판왕까지 갔던 기억이 있다. 매 스테이지마다 난관은 있지만 끝판왕은 정말 차원이 다르다. 더 민첩하고, 공격력도 더 세고, 내 공격을 견디는 힘도 더 세다. 쉴새없이 피하고 공격을 하다보면 문득 '나 이거 왜 하고 있지?'하는 물음도 스쳐지나갔던 기억이 있다.
나에게 2020년 코로나 시기가 지금까지로서는 인생의 끝판왕이었던 것 같다. 코로나는 확실히 전세계적 위기였고 동시에 내 가정과 에고를 동시에 파탄내 버렸다. 물론, 그 전에도 나와 남편 사이는 끝이 나 있었지만,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백 번 양보해서 "애아빠"라는 직책과 역할은 그에게 주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 사람이 나와 내 회사를 위협하는 선택을 했을 때 드디어 나는 그와 나의 세계가 분리되었음을 알아차렸다. 그 때 나는 도대체 내 발이 딛고 설 땅이 있을까 싶을 정도였고, 아니 그냥 허공을 유영해 다니는 해파리처럼 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와중에 업무는 너무 많고, 어려웠다. 하늘길이 막혀 모든 것이 멈춰버린 상황에서 교민들 귀국 전세기 마련, 한국에 대한 입국 요건 완화/해제 요청, 미얀마에 대한 의료 지원 등과 같은 수요가 늘어났다. 대구 신천지 사건 이후로 국내 코로나 확진자가 급증했을 때 다수 국가들이 한국발 입국자 대상 입국/방역 요건을 강화하자, 나는 본부 지침에 따라 K-방역 설명 자료를 몇 부씩 뽑아 면담 시간도 잡히지 않은 채로 미얀마 당국자를 무작정 기다려야 했다. 게다가 미얀마 국내 항공편도 마비된 터라 육로로 왕복 열 시간씩 양곤과 네피도를 이동해야 했다.
나와 내 딸의 안위도 걱정이었다. 코로나도 코로난데, 코로나에 감염되서 열악한 미얀마 현지 병원에 갈 일이 생긴다면, 오히려 거기서 더 심각한 질병을 얻게 될 위험이 더 컸다. 식당들도 문을 닫았고, 유치원도 잠정 폐쇄되었다. 나중에는 보모도 자기가 살던 지역에 코로나가 발생하여 지역 봉쇄로 인해 못 나오게 되었다. 결국은 내가 켈리를 직접 데리고 다니며 출퇴근을 해야 했다. 물론, 당시 돌봄 수요가 있는 직원은 재택이 가능하다는 지침이 있었지만, 그 때 그 상황에서 재택을 택할 여력이 없었다.
켈리는 나와 출근할 때 늘 베개를 들고 나왔다. 롯데호텔 베개가 제일 푹신해서 이걸 베야 잠이 온다는 것이다. 즉, 그녀도 나와 함께 야근할 각오를 하고 나왔다는 것이다. 하루는 KOICA(한국의 개발원조기구)의 인력을 신속히 철수시켜야 한다고 하여 부랴부랴 태국 경유 항공편을 찾아내었고, 태국대사관과 협조하여 이들 인력의 귀국을 진행하고 있었다. 태국 현지에서 KOICA 대원들이 무사히 탑승했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아직 비행기가 이륙하지는 않은 상황이었다. 그때가 밤 9시였는데 나와 켈리는 저녁도 못 먹은 상태였다. 대사님께 다음날 아침 일찍 보고하겠다고 건의는 했으나, 아무래도 이륙 직후 보고가 필요하다는 입장이셨다. 결국 우리는 근처 유일하게 문을 연 식당에서 밥을 먹고 돌아와 비행기가 뜰 때까지 사무실에 있었다. 이륙 보고를 마치고 정리하고 문득 돌아보니, 어느새 켈리는 사무실 소파 위에 "롯데호텔 베개"를 베고 잠이 들어 있었다. 잠시 후 깨어나서 내 손을 잡고 사무실을 나오며 켈리가 한 말은,
사무실 소파도 나름 괜찮네. 잠이 잘 와.
# 그래도, 나는 버텨보려 했다.
다행히 며칠 뒤 지역봉쇄가 풀려 보모가 다시 우리 집에 와 주었다. 유치원은 여전히 중단 상태였다. 화상 수업을 가끔 하기는 했지만 켈리는 유일한 한국 TV 채널인 KBS World를 하루종일 시청하였다. 내가 퇴근한 후에도 켈리는 '김비서가 왜 이럴까'를 보고 있었는데, 얼마나 여러번 본 것인지, 다음에 어떤 장면이 나올 것이라고 미리 얘기를 해주는 것이었다. 또 하루는 자기 전에 "엄마, 있다가 새벽 5시에 '슈퍼맨이 돌아왔다'가 나올 거라는데 그 때 나 그거 봐도 돼?"라고 물어보았다. 종일 TV만 너무 많이 보니까 편성표를 아예 외워버렸구나. 겁이 덜컥 났다. 이렇게 내버려 두다가는 정말 교육적인 면에서 아이에게 큰 손상을 입힐 수도 있겠다. 마지막으로 나는 망설여왔던 ISY도 알아보았다. 그곳은 오프라인 수업을 일부 한다고 하기에. 하지만 켈리 나이가 아직 몇 개월 부족하여 입학할 수가 없었다. 그 사이에 남편은 한국에서 '방치되고 있는' 켈리에 대해 계속해서 문제삼고 나를 비난하였다.
그래, 어쩔 수가 없다. 최종적으로 나는 아이를 나보다 먼저 한국에 돌려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더이상 아이에게 미안해서 나와 함께해 달라고 하기 어려웠다. 남편의 비난도 이기기가 힘들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잠깐 몇 달간 아이가 티비만 본다한들 엄마와 헤어지는 것보다 낫겠다는 생각을 했겠지만, 그 땐 내가 염두에 둘 수 있는 시간의 폭이란 게 참 작았던 것 같다. 그저 두려웠다. 하지만 그렇게 보낸 아이가 계속해서 아빠 편에 계속 지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 Please, take care of my mom
켈리가 귀국길에 오르던 날, 나는 켈리가 평소 좋아했던 마르게리따 피자를 시켜놓고 피자가 식을 때까지 펑펑 울었다. 집 안에 켈리의 물건들이 다 빠져나가고 나니 뼛 속까지 허하고 시렸다. 어딘가 위로 받을 곳이 없어서 창 밖의 쉐다곤 파고다만 바라보았다. 다음 날 육아휴직을 내고 일찍 복귀하는 방법을 알아보았는데, 인사과에서는 육아휴직이야 법적 권리이기 때문에 가능은 하겠지만 후임은 당연히 보내줄 수가 없고, 그리 되면 대사님과는 영영 척을 지고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눈을 감고, 백척간두에서 한 걸음씩 발을 디디며 6개월을 더 버텨야 했다.
이제 보모도 역할이 없으니 집으로 보냈고, 차도 이제 필요없어져서 팔아버렸다. 아이가 떠나고, 아이의 물건도 빠져나갔으니 집이 더 넓어져야 하는데, 내 세계는 고새 반쪽이 되었다. 매일밤 느끼던 켈리의 살결 냄새도 맡을 수가 없었다. 보모가 잔뜩 움츠러 든 내 어깨를 토닥이며 해 주었던 말을 잊을 수가 없다.
Last week she told me, please take care of my mom.
If anything happens, call me.
그래, 생각해보니 켈리는 애초에 '엄마를 혼자 둘 수 없다며' 미얀마에 와 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나는 오히려 내가 켈리를 돌본다고 생각했었다. 엄마를 돌보려고 왔는데 더이상 돌보지 못해 한국에 가야하니까 보모에게 말했나 보다. 엄마를 부탁해. 라고. 켈리의 깊은 속을 어찌해야할 지 가끔은 엄마지만 측량하기가 어려울 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