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엄마라서 사랑해.
나로선 참 딜레마다. 적과 같은 남편을 억지로 수용해가면서 내 딸을 위해 가족의 울타리를 유지해야 하는 것인지, 아님, 내 자신의 인생을 구하는 대신, 딸에게 엄마의 부재를 견디게 할지. 참, 천벌과도 같은 상황이다. 결국 현재 나는 후자를 택하고 있고, 그 이유는 내 딸이 내 경험을 반복하도록 만들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엄마는 5살 때 아빠와 이혼했지만 결국 내가 눈에 밟혀서 다시 돌아오셨다. 그리고 나서 긴긴 세월을 사업을 하는대로 망하는 아빠, 병에 걸려 버린 아빠를 견디며 가족들을 먹여 살려야 했다. 나는 사춘기 시절, 그렇게 엄마가 고생을 하시는 게 다 내 탓으로 여기고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은 충동을 느꼈을 정도로 괴로웠다.
이제는 남편에 대한 혐오도 없지만, 아니, 제대로 말하자면 원래부터 없던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내 자신에게 적과 같은 존재와 버겁게 살아가는 고통을 스스로 선택하고 싶진 않다. 인생은 짧고 시간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한정되어 있으며, 그렇기에 그런 식으로 낭비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한 때 결혼하지 말고 애만 낳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십년전 스탠포드 대학 연수 시절 대학가에 유명한 정자은행이 있었는데, 미국에선 그 당시에도 이미 정자은행에서 정자를 구해 인공수정을 통해 아이를 낳는 사람들이 꽤나 있었다. 나도 잠깐 그 생각을 했었는데, 당시에는 사유리 같은 케이스가 없었다. 사유리가 선수를 친 것이다. 하긴, 그래도 결혼까지 하긴 했지만 (전) 남편을 단지 내 아이의 "생물학적 아버지"라고 생각한다면, 덕분에 켈리가 태어났기에 고맙기도 하다. (제발 나를 놔 주었으면..)
켈리가 잠시 골똘히 생각하더니, "엄마가 아빠랑 결혼 안했어도 내가 태어났을까?"라고 물었다. 순간 나는 내가 애한테 너무 경솔하게 별걸 다 얘기했구나 싶었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흠.. 엄마는 아빠는 싫지만 그래도 아빠 덕분에 켈리가 태어난 건 너무 감사해"라고 얼버무렸다. 그랬더니 켈리가 "엄마 걱정마~ 엄마가 정자로 애기 낳아도 어차피 엄마는 내 엄마야~ 내가 하늘에 있을 때 엄마 골라서 내려온 거거든"이라고 하지 않는가!!
참 신기하다. 가끔 켈리는 신통한 말을 하곤 했는데, 가령 "엄마 나 엄마 뱃 속에 있었을 때 생각난다. 엄마 맨날 뛰어 다녔지? 엄마 뛸 때 나는 엄청 뱃 속에서 수영했어~"라고 한다든지. 아무리 초긍정 전차 오겡끼라 하더라도 자식 앞에선 너무나 작아지는데. 켈리가 말해 주었다.
엄마는 엄마니까 엄마야. 나는 엄마가 엄마라서 엄마를 사랑하는 거야
엄마도 켈리가 켈리라서 너무 사랑해. 어딜 헤매다가 나를 통해 이 세상에 온 것일까. 켈리 너는 축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