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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dy Spider Oct 01. 2023

그리운 미얀마

구름, 노을, 미소, 그리고.

# 행복은 찰나 : 험지가 그리운 이유

이상하게도 외교관들에게 첫 험지는 '제2의 고향'처럼 늘 그리운 곳이 된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는 그 나라 이름의 첫 글자만 말해도 학을 떼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이 험지 근무 당시의 고생은 다 잊어버리고 '그곳에 다시 가고 싶다'라고 한다. 이유는 정말 많다. 모든 것이 '쉽지 않음' 속에서 잠깐 고개를 들어 올려다본 하늘이 너무도 아름다울 때, 한참 머릿 속으로 업무 생각을 꼬여있을 무렵 어느새 해질녘 노을이 손에 잡힐듯 내려앉았음을 발견했을 때, 미얀마에서 난 찰나의 행복을 느꼈다. 그런데, 이런 얘기를 나누다 보면 미얀마에서 함께 근무했던 모든 동료들이 격하게 공감한다. 구름, 노을, 그리고, 어쩌면 그 배경이 되었던 '어려움' '갑갑함' '녹록치않음'이 그 구름, 노을과 어울려 만들어 내던 콜라쥬를 다들 그리워했다.


특히, 나는 새벽에 네피도 출장 갈 때 바라본 새벽 구름, 우기에 비오기 직전 구름, 네피도에서 육로로 양곤 복귀할 때 차창 밖을 스치던 구름, 양곤에서 모든 업무를 마치고 모히토 잔을 통해서 바라본 일몰이 참 좋았다. 미얀마 근무 기간 중에 업무적으로 번아웃에 가까운 격무를 겪었고, 남편과의 갈등이 극단으로 치달아 가정은 파괴되었지만, 코로나 속에서 사랑하는 딸 아이를 6개월 먼저 한국으로 돌려보내야했었지만, 나에게 미얀마 근무는 땅끝 마을 여행이었다. 끝 한가운데 서서 끝이 없음을, 사실 시작도 없었음을 알게되는 그런 시간들이었다. 매순간 끝과 한치의 오차없이 달라붙어 있는 시작을 살아갈 용기를 얻은 곳이다.


# 미소의 역설

미얀마는 미소를 관광상품으로 만들어도 좋겠다 싶을 정도로, 사람들의 미소가 너무나 순수하고 아름답다. 온갖 생각 속에 갇혀 있다가 길거리에서 만난 미얀마 사람들의 미소를 보면 도대체 왜 내가 그 좁은 생각에 매여있던가 하는 자각이 오면서 내 내면도 그렇게 깨끗하게 정화하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그들의 미소는 자연스럽게 우러나온 천연 민트차처럼 상큼하면서도 깊은 자각을 주었다.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미얀마 사람들의 여건은 전혀 행복하지 않다. 2차 세계대전 직후에는 태국, 싱가폴보다 부유한 '아시아의 보석'이었지만, 오랜 군부통치 끝에 고질적인 빈곤에 빠져버렸다. 민족간 내전도 계속 진행 중이고, 곳곳에 인권탄압 문제도 심각하다.


그러니, 미얀마 사람들의 미소는 참 역설적이다. 행복한 상황에서 나오는 미소가 아니다. 오히려 반대의 여건 속에서, 아니, 객관적 여건과 관계없이 built-in된 미소이다. 나와 함께 지냈던 미얀마 보모도 늘 미소를 지었고, 그 따뜻한 미소가 켈리의 마음에 남아있다. 그녀는 한달에 백불만 받고도 집안의 모든 일을 다 했고, 내 성격상 이것저것 직접 따져가며 시키지 않았는데도 알아서 필요한 일들을 했다. 게다가 미얀마의 가장 큰 명절인 띤잔을 맞아 보너스를 주었는데, 나중에 그 보너스로 뭐 했냐고 물어보니 기부를 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느긋함, 여유가 미얀마의 경제발전을 막는 걸림돌이라고 했지만, 난 잘 모르겠다. 미얀마 사람들의 미소는 거액을 들여서라도 타임캡슐에 저장하고 싶은 아이템이다.


# 내 딸의 즐거움은 따로 있었다. 

물론, 나의 미얀마 생활을 견디게 해 준 것이 구름, 노을, 미소만은 아니었다. 미얀마에는 'Myanmar Beer'라는 맥주가 있었다. 이게 원래 미얀마 군부 기업과 일본 기업(기린맥주)이 합작하여 만든 맥주인데, 2021년에 미얀마 군대가 쿠데타를 일으킨 후 기린맥주측이 군부기업과 협력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발표하고 미얀마에서 철수하면서 판매가 중단되었다. 나는 퇴근 후 이 미얀마 맥주를 한 캔 마시는 게 달콤한 일상의 낙이었다. 지금은 구할 수 없게 되어 안타깝지만 그 맛을 떠올려보자면, 이미 소주 한 잔을 섞은 듯한, 간이 잘 밴 소맥 맛이었다. 진하고 묵직한 맛. "다 괜찮다"라고 속을 쓸어 내려가주는 맛.


그런데 중국보다 미얀마가 더 좋다는 선호를 분명히 밝힌 켈리의 즐거움은 따로 있었다. 바로, 양곤에 소재한 "가장 좋은 호텔" 롯데 호텔 레지던스에서의 생활이었다. 양곤 집값은 상당히 높은 편이어서 내 지원금 실링으로는 25평 정도의 레지던스를 구할 수 있었는데, 그닥 넓지 않아도 나와 내 딸이 지내기에 그 곳은 천국이었다. 이틀에 한번 침대 시트를 갈러 왔었고, 호텔 직원들이 쓰레기도 매일 비워주었다. 켈리는 매주 주말 야외 수영장 가는게 아주 큰 낙이었다. 하도 호텔 곳곳을 돌아다녀서 거의 모든 직원들이 켈리를 알 정도였다. 그곳이 켈리의 놀이터였던 것이다. 켈리는 누군가 새로 이사온 가족이 있으면 자기가 먼저 다가가 호구조사를 하고 나서 나에게 귓속말로 다 알려주곤 했다. 엄마가 굳이 운을 떼어주지 않아도 자기가 알아서 그 쪽 부모님들과 아이스브레이킹을 한 후 친구들과 주말 수영장 약속을 잡곤했다.


2019년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그 때 커다란 크리스마스 선물로, 김무성 의원이 미얀마를 방문했었다. 참... 날짜도 참 예술적으로 크리스마스 전전날 도착해서 크리스마스 당일 오전에 떠나는 일정이었다. 김무성 의원이 도착해서 숙소를 안내하는데, 나는 일부러 '당신이 토요일, 그것도 크리스마스 전전날에 와서 내 딸도 같이 일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켈리도 함께 데리고 갔었다. 그랬더니, 켈리에게 용돈도 쥐어주고, 숙소에 넣어준 초코렛도 준다. 그런데, 너무 웃겼던 건, 켈리가 한 말이었다.


여기가 우리 집이에요! 여기 1층은 로비이고 밖에 수영장도 있어요~

응, 켈리야 안 물어봤는데 ㅎㅎ 다들 켈리의 엉뚱한 말에 웃음을 터뜨렸지만, 정말 그 때 켈리는 롯데호텔 전체가 자기 집이라고 인식했던 것 같다. 정말 엄청난 주인의식이다. 켈리가 나보다 먼저 미얀마를 떠나고 나서 많은 롯데호텔 직원들이 켈리 어디 갔냐고 물어봤었다. 켈리가 떠난 롯데호텔 로비는 정말 무언가 텅빈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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