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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제일 듣기 싫은 말

06. 딸이니까 하는 말

by 마흔아홉

딸한테니까 내가 이런 말이라도 하지, 누구한테 하겠니? 평생 엄마가 입에 달고 사시던 말이다. 여섯 자매가 있고 동서가 넷이나 있고, 친목모임이 수십 개가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지. 엄마는 그 누구에게도 말 못 할 속내라며 내게 털어놓으시기를 수십 년, 아주 어릴 적부터 그렇게 오롯이 혼자 엄마의 감정을 받아내야만 했다.


그래서 나는 세상 그 어떤 말보다 딸이니까 하는 말이 제일 싫다. 그런데 뇌경색으로 투병 중인 엄마의 입에서 또다시 그 말이 나왔다. 편찮으신 엄마한테 하지 말라고 성을 낼 수도 없다.



06. 딸이니까 하는 말, 세상에서 제일 싫은 듣기 싫은 말


내 귀를 의심했다. 병원비 때문에 엄마를 퇴원시켰다고?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지나고 나서 다시금 생각하니 엄마는 누구보다 아들에 대해 더 잘 아는 분이었다. 아들을 매우 사랑하셨지만 사랑하는 만큼 믿지는 않았다.


"OO이가 돈 때문에 퇴원시킨 것 같아. 딸이니까 너한테나 말하지 누구한테 말도 못 하겠다."

"아니 엄마, 내가 준 돈도 다 줬다며. 지가 썼으면 뭐 얼마나 더 썼다고 그러겠어."

"그렇겠지? 네 돈도 OO이 다 줬어. 병원비 더 들어가면 은행에 넣어둔 이천만 원도 쓰라고 했어"

"근데도 돈 때문에 OO이가 그랬다고? 설마, 엄마 괜히 아들 잡지 마"

"그래 그러면 다행인데, 기껏 해야 한 달 동안 천만 원이 넘게 들어갔다고 노래를 부르는데, 앞으로도 계속 들어가잖아. 요양병원도 1인실이니 아무래도 더 들어갈까 봐 그래서 퇴원시킨 것 같아."

"엄마, 그럼 지금 당장 나랑 병원 가자. 병원비 내가 다 낼 테니까 눈치 보지 말고 가자."

"내일 OO이 온다고 했어. 아들 처분 기다려야지. 너랑 갔다가 예전에 아빠 때처럼 성질내면 힘들어"


진짜 저 워딩 그대로 말씀하셨다. 일상적으로 우리는'처분'이라고 하면, '처리하여 치움',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를 결정함'을 의미한다. 엄마와 아빠는 당신들의 거취에 대한 모든 결정에 대해 아들의 처분을 기다리신다고 했다.


처분이라니.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다. 부모 노릇을 못하지 않으셨다.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가난하지도 않았다. 죄을 지으신 것도 아니시면서 아들 처분을 기다리신단다. 지친다. 더 이상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병원비며 간병비며 나와 반반씩 부담한다는 것을 아는 엄마다. 그럼에도 동생의 처분이 필요하다고 하신다. 아들 앞에서는 그렇게 퍼주고도 죄인이다. 내가 다 부담할 테니까 가자고 해도 아들이 아니면 안 간다고 한다.


딸은 언제나 돈만 주면 그만이지? 함께 하고 싶은 이는 늘 아들이다. 여기서 내가 무엇을 더 했야만 했었는지 사실 지금도 잘 모르겠다. 원하시는 대로 돈만 지원했어야 했나? 참견하지 말고?. 답답하다.



아빠가 정년퇴직을 하시고 아빠와 엄마는 나의 피부양자로 등록되었다. 동생이 번듯한 사업을 하면서도 결혼을 한 후에도 아빠와 엄마는 나의 피부양자로 계셨다. 지금이야 건강보험증이 없어도 불편함이 없지만 2000년대 초반, 건강보험증이 없으면 병원 접수가 꽤 불편하던 시기가 있었다.


"이모두 옆집 아줌마도 병원 갈 때 보니까 아들 건강보험증이던데 나는 언제나 아들 이름 새겨진 건강보험증 쓸 수 있으려나?"

"아니 그럼 OO 이한테 피부양자 등록해 달라고 해. 돈 드는 것도 아니고 그게 뭐라고 끌탕을 해?"

"아들이 올려줄 때까지 기다려야지. 부모가 돼서 어떻게 해달라고 하냐"


이게 한숨씩이나 쉬면서 가슴앓이를 할 만큼 자식에게 하기 어려운 부탁인가? 아니 아들에게만 하기 어려운 부탁이었던가? 나는? 10년이 넘도록 나의 건강보험 피부양자로 살아오신 엄마다. 가끔씩 저렇게 말씀하시는데 한 두 번도 아니고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나라도 동생한테 말한다고 하면 아들의 처분을 기다린다며 말리셨다. 아들한테 조급하게 굴면 안 되다고.


엄마는 돌아가시는 그날까지 나의 피부양자로 계시다 돌아가셨다. 20년 이상을 단 한 번도 그토록 원하던 아들 이름이 새겨진 건강보험증을 가져보시지 못하고, 아들의 건강보험에 이름 석자 올리지 못하신 채 떠나셨다. 우리를 아는 그 누구도 엄마의 이런 마음을 몰랐고, 엄마는 내색조차 하지 않았다. 오로지 딸인 나에게만, 나만 붙잡고 하소연을 하신다. 대체 나보고 뭘 어쩌라고?


남들은 당연하게 해주는 자식 노릇을 당신의 아들이 해주지 않는다는 그 사실을 누구에도 말하고 싶지 않아 하셨다. 자존심 상하신다고. 아들에게 대접받지 못하는 것 같아 너무 싫다고. 이게 왜??? 자존심을 상해야만 하는 일인지 나는 예전에도 이해하지 못했고, 지금도 이해하지 못하겠다.


어찌 됐든 나의 부모님은 저런 사람들이다. 아들의 결정을 따라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아들이 하자는 대로 해야만 한다는 분들이다. 나름 바꿔보려고 설득도 해보고 사정도 해보고 안 해본 일이 없지만 변하지 않았고 변할 생각조차 없었다.


엄마의 하소연을 들어드리고 있는데 잠을 청하던 아빠가 시끄러워서 잠을 못 자겠다며, 오늘 하루 엄마와 너무 피곤하셨다며 늦었는데 집에 가라고 나를 밀어내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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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시오패스' s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하며 자신의 행동으로 타인이 피해를 입어도 죄책감 따위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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