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때? 돈 좀 벌었어?

나는 잘못하지 않았고, 잘못되지도 않았다.

by 마흔아홉

보통의 날들처럼 출근을 하고,

업무를 보고 있던 여느 날과 다름없던 그런 날

부장 A가 지나가다 말고 내 자리에서 걸음을 멈추고 뜬금없이 묻는다.


"어때? 돈 좀 벌었어?"


입사한 지 20여 년, 함께 한 시간이 길다 보니

선을 넘는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예상치 못했던 갑작스런 질문에 머리가 띵해졌다.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 해 의아하게 쳐다보니 다시 묻는다.


"아니, 상속 정리됐을 것 같아서. 많이 물려받았냐고."


순간 사무실 안 모든 이의 시선이 나를 보는 것만 같다.

물려받을 것이 없다 하니 거짓말 말라며 손사래를 친다.

하다못해 사시던 집이라도 있을 텐데

어떻게 한 푼도 없을 수가 있냐며

내 말을 한턱 내기 싫은 이의 거짓말쯤으로 치부해 버린다.


이제 와서 굳이 숨길 필요도 없어 사실 그대로 말했다.

세세한 이야기까지 하기는 구차스럽기도 해서.

그가 이미 오래전에

'유언대용신탁'을 통해 돈이 될만한 부모님의 재산을

가로채버렸다고. 심지어는 내가 드린 예금까지도.

그래서 부모님의 재산을 한 푼도 받을 수 없다고 말이다.


궁색한 변명쯤으로 들릴 수도 있겠다 싶었다.

내가 불효자라 상속에서 빠져버린 것을 감추려고 말이다.

그런 시선에 개의치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으면 그렇게 생각하게 둘뿐,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없을뿐더러

사실,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도 없다.


나를 알고, 나의 부모님을 아는 사람들은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럴 줄 알았어. 그는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야."


평생을 두 분을 휘둘러 왔던 그이기에 놀랍지 않다고 했다.

결국 가장 안타까운 이는 나의 부모님일 뿐이다.


A는 굳어버린 듯 뭐라 말을 잇지 못했고,

사람들은 할 말을 찾지 못했는지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만 부산스럽게 들린다.


웃프다는 말이 생각났다.

본의 아니게 즐겁지 않은 가족사가 공개되었고

그로 인해 내 말을 들은 사람들만 머쓱해져 버렸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남들은 그렇지 않게 되어버렸다.


저 안의 누군가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테고

또 다른 누군가는 삐딱하게 바라볼 수도 있을 것이며

공감하며 위로를 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때였다. 난데없이 이사님이 끼어들었다.


"거참, 이런 일이 또 있네. 우리 큰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사촌형이 재산을 몰래 자기 앞으로 돌려버린 거지. 뒤늦게 안 동생들이랑 크게 싸우고 관계를 끊고 서로 왕래를 안 했어. 그러다가 작년에 자녀 결혼식 청첩장을 돌린 거야. 웃긴 건 날짜랑 시간이 같았다는 거야. 어쩔 수 있나. 나는 큰 사촌한테 가고 아내가 셋째 사촌한테 갔지. 의절하고 연락을 안 하니 그런 일도 생거더라고"


"아니, 부모님 재산을 빼돌린 사람 결혼식을 갔다고?

안 갔어야지. 나 같으면 안가."


헉, 사장님이다. 사장실에 계셔야 할 사장님이 등장하며,

분위기는 이상하리만치 뜨거워졌다.

이게 뭐라고,

짧은 말 한마디가 회사를 뒤흔든 듯 소란스럽다.

가벼운 마음으로 질문을 던졌을 A는

다른 이들의 참전에 마음이 가벼워졌다는 듯

내 등을 몇 번 토닥이고는 자리를 떴다.


다른 이들은 사연 배틀이라도 벌어졌다고 생각하는지

자기들이 아는 남의 이야기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이미 나는 안중에 없었다.

B가 말을 이어갔고 그 뒤를 다른 이들이 받으며 이야기는 점점 더 커져만 갔다.

"저는 친한 언니 엄마가 큰 이모랑 의절했어요. 언니 외할머니가 평소에 착용하시던 금반지와 금목걸이가 있었나 봐요. 요즘 금값이 많이 올랐잖아요.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언니네 엄마가 그걸 팔아서 나누자고 했는데 큰 이모가 못 봤다고 딱 잡아떼더래요. 외할머니는 혼자 사셨고 돌아가셨을 때는 큰 이모가 발견하셨다나 봐요. 외할머니가 틀니는 빼먹었어도 금목걸이, 금반지는 빼신 적이 없었다는데, 돌아가셨을 때 그게 없더래요. 의심이 갈 수밖에 없는 거죠."


"우리는 사촌형이 작은어머니한테 집을 팔고 자기랑 살자고 하더래. 작은어머니 혼자 사시는데 그 집도 재산이럐 봐야 집 하나가 다거든?. 그 집 팔아서 자기 달라는 거지. 작은어머니는 며느리 시집살이 싫다고 당신 죽고 나서 둘이서 알아서 하라고 하셨다는데, 사촌형이 포기가 안되는지 담보대출이라도 받아달라고 했다는 거야. 그게 사실상 당장 집 달라는 거랑 뭐가 다르냐는 거지. 그 집도 누나 하나거든."


"얼마 전에 우리 장인어른께서 돌아가셨잖아. 장인어른 땅이 꽤 되거든? 그런데 그 땅이 모두 처남 앞으로 명의가 바뀌어 있는 거야. 집은 장모님 명의로 해놓고 말이지. 와이프나 처제들이 의심을 하는 게 명의가 바뀐 시점이야. 그게 병원 입원하셔서 정신이 오락가락하시던 상황이었거든. 그 상태에서 서류를 마련하고 신고까지 하는 게 가능한지 말이 안 된다는 거지. 게다가 병원비가 많이 들어가서 그 땅을 파네 마네 하다가 형제들이 각출했던 상황이었거든. 장모님이 속상하실까 봐 당장은 조용한데, 조만간 터질 것 같긴 해. 나는 처가 문제라 섣불리 개입하기 어려워서 입 다물고는 있는데 기분이 참 그렇더라고."


"나도 오촌형이 혼자 살다 돌아가셨어요. 자식도 없으니 형제들한테 상속권이 있나 봐요. 돌아가시고 나서 재산을 나누려고 봤더니 막내형이 큰형 생전에 무슨 수를 썼는지 자기 앞으로 모두 이전해 놨더라는 거예요. 그때 오촌형 형제들이 난리가 났었어요. 그 집도 형제간 아예 왕래를 끊었잖아요."


"그러고 보니 나도 비슷한 상황인 것 같은데요? 우리 아버지 작년에 돌아가셨잖아요. 남동생이랑 살았는데, 1년이 넘도록 아버지 명의의 공장땅에 대해 어쩌자는 말이 없어요. 언니랑 나는 팔리지 않는가 보다 하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제 보니 나도 확인해봐야 할 것 같은데요?"


이쯤 되니 나를 위로하려는 건지,

남의 집 이야기에 재미라도 들린 것인지 모르겠다.


어찌 됐든 내 사연은 이미 내 손을 떠나버렸다.

너나없이 각자가 아는 남의 집 사연들을 늘어놓는데,

내 이야기는 그 속에 끼기조차 어렵지 싶다.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다.

그중에는 비뚤어진 욕심으로 얽혀버린 이들도 많고

그들로 인해 말 못 할 사연이 생긴 집도 너무 흔해서

그렇지 않은 집을 찾기가 더 어렵다는 현실이

새삼스러울 만큼 아플 뿐이다.

인간의 욕심이 얼마나 강렬하며 파괴적인 것인지.


사무실이 마치 토론장이라도 된 듯 설전이 오가는 사이

'막장 드라마가 현실보다 더 현실적'이라는

시쳇말이 떠올랐다.

그들의 갑론을박에 묘한 시원함이 느껴지던 그때

사장님의 한마디로 분위기가 정리되었다.


"다시 말하지만 그러면 안 되는 거야. 콩 한쪽이라도 나눠갖는 게 사람도리인데, 그걸 빼앗는 사람들? 나는 그런 사람들과는 애초에 어울리고 싶지가 않아. 재산을 누가 더 가지고 누가 덜 가지고가 아냐. 남의 것을 빼앗는 행동 자체가 문제이지. 형제 것조차 뺏어가는 사람이 남의 것은 얼마나 강탈해 갈까? 그런 사람들과는 어울릴 필요가 없어. 사람도 아니라고 생각해. 나는"


"O부장도 동생이라고 생각하지도 마. 인연 끊어. 내가 부모님 생각해서 차마 욕은 못하겠는데, 굳이 이어갈 필요 없어. 형제도 아니야. 남만도 못해. 그런 동생은. 동생 아냐."


그렇게 일갈하고는 약속이 있다며 자리를 떠나셨다.

사막을 걷다 오이시스를 만난 사람의 기분이 지금의 나 같을까?

더운 여름 시원한 사이다 한 모금이라도 마신 것처럼

속이 뻥 뚫린 것 같았다.


나 혼자만 겪는 일은 아니었구나,

나만 바보처럼 당한 게 아니었구나 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

그 순간 내가 느낀 감정은 뭐라 표현하기가 힘들 만큼 깊고 복잡했다.


"인연 끊어도 뭐라 할 사람 없어. 형제도 아니야. 남보다 못하다."


나에게는 그 말 한마디가 일종의 면책특권처럼 들렸다.

내가 잘못한 것이 아니라는 확신,

그를 끊어내도 된다는 정당함이 거기에 있었다.


마음 한 구석 손톱 끝만큼만 이 나마 남아있던 죄책감(?)을

한 번에 날려준 그 말에 커다란 위로를 느꼈다.

끊어내도 되는 일이었다.

나는 잘못하지 않았고 잘못되지도 않았다.

그것은 나의 잘못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제사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 같다.


그는 자신의 말이 이렇게까지 위로가 되었을 줄은 모를 것이다.

그의 단호한 그 한마디 덕분에

그를 미련 없이 끊어버린데 대한 죄책감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불쌍하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안쓰럽게 여겨지기도 싫었다.

울고 짜고 질척거렸으면 오히려 싫어졌을지 모를 나였다.


살아가면서 쌓여진 내공이 있어야만 위로도 질척이지 않는가 보다.

무심하게 건넨 위로였지만,

내 가슴속 깊이 와닿았다.


나는 위로받았고, 그 안에서 희망이 피어났다.

헤어질 준비가 끝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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