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명흔 Mar 26. 2023

호기심이 생긴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

"하밀 할아버지, 사람은 사랑 없이도 살 수 있나요? (12쪽)


에밀 아자르의 소설 <자기 앞의 생>에서 모모가 좋아하는 하밀 할아버지에게  질문하는 장면이다. 요 근래 처음으로  진득하게  소설을 읽었다.


부모에게 버림받은 모모와 그런 아이들을 맡아 키우는 로자 아줌마, 양탄자 행상 하밀 할아버지, 무슨 일이든 부르면 달려와 주는 롤라 아줌마 등. 모모를 둘러싼 주변 인물들의 목소리가 들릴 것 만 같다.

오래 여운이 남아 혹시 이 작품이 영화화되지 않았을까 하고 넷플릭스에 들어가 검색했더니 다행히 있었다.  영화도 달뜬 기분으로 봤다.

영화 속 나이 들어가는 소피아 로렌의 연기를 다시 만난 건 좋았지만 왠지 책 속 로자 아줌마와(95킬로 거구)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영화는 책만 못했다. 물론 '못하다'는 평가는 순전히 내 생각이다. 모모와 주변 배경 묘사와 등장인물들의 섬세한 호흡까지는 담아내지 못한 것 같다.

나는 책을  읽고 나면 좋은 느낌을 받은 책이라도 선뜻 다른 이에게 잘 권하지 않는다. 이유인즉슨 상대방의 독서 취향도 잘 모르'거니와 읽었던 책을 상대방에게 설득력 있게 소개할 말만 한 말 주변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젠 왜 그랬을까. 저녁 식사 자리에서 두 얘들 에게 일독을 권했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주인공들을 거론하려 하자, 작은 녀석의 '스포 하지 마시라'는  막음에 아차 싶었다. 그렇게 재미있었냐며 꼭 한번 봐야겠 단다. 말대답일지라도 기분 좋았다. 이 책이 과연 작은 녀석에게는 어떻게 읽힐까도 의문이다.

나는 이 작품을 통해 작가 로맹가리를 처음 만난다. 내가 소설을 그다지  즐겨 보지 않은 이유기도 하다. 이 책 덕분에 그가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으로 두 번이나 공쿠르상을 받았다는 것도 말이다.

로맹가리가 몹시 궁금하다. 그래서 이어 읽을 다른 책을 한 권 찾아보다가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로 정했다. 순전히 책 제목이 마음에 들어서다.

지금까지 읽은 책 중엔 이렇게 제목만 보고 선택했다가 낭패 본 경우도 없진 않지만 적어도 이 <자기 앞의 생> 정도의 문장의 몰입감이라면 재미가 배가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있다.

작가 로맹가리는 14살 모모의 입을 통해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비범하게 들려주는 재주가 있는 것 같다. 부모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남의 손에 맡겨져 도둑질을 하거나 약을 파는 모모나 창녀의 아이들을 돌보며 죽어가는 로자 아줌마의 비극적인 삶도 사랑이었다니, 이 또한 순전히 내 느낌이지만 말이다.

책이 포스트잇으로 알록달록 하다. 밑줄 그은 문장들이 많다.

밑줄 그은 문장이란 그때의  상황과 심정에 따라 다르겠지만, 기억하고픈 문장들이 많아  여러 번 읽었던 <그리스인 조르바>처럼 이 책 역시 언젠가 다시 읽고 싶어 펼칠 날도 있으리라.


인상 깊게 다가왔던 문장을 옮겨  왔다. 최근에 책을 읽고 가슴이 설레 보기는 처음이다. 작가 로맹가리에 대해 이제부터 천천히 알아가야겠다.

"정의롭지 못한 사람들이 더 편안하게 잠을 자는 것 같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은 남의 일에 아랑곳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정의로운 사람들은 매사에 걱정이 많아서 잠을 제대로 잘 수 없다.(46쪽)"

"완전히 희거나 검은 것은 없단다. 흰색은 흔히 그 안에 검은색을 숨기고 있고, 검은색은 흰색을 포함하고 있는 거지.(96쪽)"

"아줌마에겐 아무도 없는 만큼 자기 살이라도 붙어 있어야 했다. 주변에 사랑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사람들은 뚱보가 된다."(99쪽)

"법이란 지켜야 할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나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하밀 할아버지는 인정이란 인생이라는 커다란 책 속의 쉼표에 불과하다고 말하는데,... 로자 아줌마가 유태인의 눈을 한 채 나를 바라볼 때마다 인정은 쉼표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쉼표가 아니라, 인생 전체를 담은 커다란 책 같았고 나는 그 책을 보고 싶지 않았다.(118쪽)"

"저능아란 세상에 재미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어서 자라지 않기로 마음먹은 아이다.(135쪽)"

"우리가 세상에서 가진 것이라곤 우리 둘 뿐이었다. 그리고 그것만은 지켜야 했다. 아주 못생긴 사람과 살다 보면 그가 못생겼기 때문에 사랑하게 되는 같다. 정말로 못생긴 사람들은 무언가 결핍 상태에 있기 때문에 오히려 장점이 된다.(232쪽)"

"생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256쪽)"

"아줌마는 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한 사람이에요. 의사들을 즐겁게 해 주자고 아줌마를 식물처럼 살게 해서 세계 챔피언이 되게 할 생각은 없어요. 내가 불쌍한 사람들 얘기를 쓸 때는 누굴 죽이지 않고도 하고 싶은 얘기를 모두 다 쓸 거예요."

"하밀 할아버지, 사람은 사랑할 사람 없이도 살 수 있나요?(303쪽)"

"그녀는 이제 숨을 쉬지 않았지만, 그런 건 상관없었다. 숨을 쉬지 않아도 그녀를 사랑했으니까. 나는 그녀 곁에 펴놓은 매트에 내 우산 아르튀르와 함께 누웠다. 그리고 아주 죽어버리도록 더 아프려고 애썼다.(305쪽)"


작가의 이전글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