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명흔 Mar 28. 2023

호프 자런(Hope Jahren)처럼 무싹 바라보기

'어, 그새 물을 다 먹었네.'

매일 물타령이야. 무순이 새파랗게 올라왔어. 몸뚱이도 없는 것이 걸신들린 것 같아. 물 타박이 여간 아니야. 그런데 무싹은 왜. 언제부터 키웠냐고? 글쎄. 언제였더라.


어느 날 뭇국을 끓여 먹고 남은 토막이 주방 구석에서 삐들삐들 말라가기에 그냥 물 컵에 담가 봤어. 잘 키워 뭘 어찌해 보겠단 생각은 없었어. 그냥 그럴 때 있잖아. 버리긴 아깝고 그렇다고 이걸로 뭘 해 먹기에도 마땅찮은 그런 상태말이야.


그렇다고 이것을 음식물 쓰레기통에 처박는 것도 그다지 내키지 않았거든. 그래서 그냥 그래 본 거야. 그러고는 며칠 잊고 있었지.


그런데 어느 날 주방 청소를 하면서 보니 글쎄, 바짝 마른 물컵 속에서 초록 돌기가 오돌토돌 돋아나는 거야.


뭐지. 손가락 길이만 한 토막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신기해서 들명날명 물을 주기 시작했어. 근데 요게 무섭더라고. 얘는 밤에도 안 자고 용두질을 하는 것 같아. 자고 나면 바닷속 말미잘이 촉수를 길게 늘어뜨린 것처럼  돌기가 커져 있어. 줄기가 톱톱해지고 잎이 세포분열 하듯 나날이 커지는 거야. 아무래도 혼자 봄처럼 살려고 무진 애를 썼나 봐.


물 줄 때마다 들여다보는데 이건 그냥 무토막이 아닌 거야. 물끄러미 보고 있으니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이 보여. 왜 있잖아. 평소엔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하지만, 기회가 오면 문어 빨판처럼 붙잡고 그 일을 서슴없이 해 내는 그런 사람 말이야.


지금도 물 한 컵을  주고 있어. 이제는 오글오글한 초록 잎에 지문처럼 무늬가 보여. 먼저 틔운 잎과 나중에 틔운 잎의 양분을 적절히 나눠 주는 것 같아. 그걸 보면  무싹은 철저히 계산된 본능으로 진화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어.


와우! 저러다 뿌리가 물컵 가득 차면 잎으로는 성이 안 차 꽃까지 피우는 거 아냐. 왠지 그래.

물론 그리 되기까지는 나의 끊임없는 관심이 지속되어야 하겠지만. 그건 그렇고.


혹시 무꽃 본 적 있니? 난 한 번도 못 봤거든. 그러고 보니 채소꽃은 귀한 것 같아. 우리는 아주 오래전부터 채소 꽃이 피기도 전에  잎이나 뿌리를 먹고 살았으니까. 꽃도 제대로  피워보지 못하는 무나 배추, 상추나 부추, 같은 초록 채소들을 떠올리면 왠지 이것들슬픈 야채사가  보이는 거 같아 짠한 거 있지.


근데 무꽃은 무슨 색일까. 배추나 유채꽃처럼 노랑? 아니면 하양, 꽃송이는 클까? 아님 안개꽃처럼 오종종할까? 흰꽃이면 예쁘겠다. 무꽃에 날아온 흰나비, 아님 노랑나비....,


어쩌면 조만간 저것을 화분에 옮겨 줘야 할지 모르겠어. 사실 난 과학은 잘  모르지만 꽃이 피고 씨앗을 맺으려면 왠지 그래 줘야 할 것 같아. 고추씨앗이 포트에서 싹 터 잎이 나면  고추밭에 옮겨 심듯 옮겨 심듯 말이야.


꽃이 피면 나중에  씨앗까지?

내가 너무 거창한 생각을 한 걸까?....,


싹 난 무토막을 보자 과학을 재미있게 풀어쓴 <랩Lab걸Girl>의 여성 과학자 호프 자런(Hope  Jahren)이  떠올랐어. 본능에 충실한 나무들도 매 순간 제 유전자를 기억하며 꿈을 꾼다는 신선한 얘기에 솔깃해서  한번 흉내 내 써 봤어.


작가의 이전글 호기심이 생긴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