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명흔 Jan 05. 2024

09  <혼불>과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만난 문장

"기다리는 것도 일이니라. 일이란 꼭 눈에 띄게 움직이는 것 만이 아니지. 모든 일의 근원이 생각에서 비롯되는 것인즉. 네가 중심을 가지고  때를 고요히 기다리자면 마음이 고여서 행실로 넘치게 마련 아니냐.  이런 일이 조급히 군다고 되는 일이겠는가. 반개한 꽃봉오리 억지로  피우려고 화덕을 들이 대랴. 손으로 벌리랴. 순리가 있는 것을,"(혼불1권.262쪽)

 

"나는 어느 날 아침에 본, 나무등걸에 붙어 있던 나비의 번데기를 떠올렸다. 나비는 번데기에다 구멍을 뚫고 나올 준 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나는 잠시 기다렸지만 오래 걸릴 것 같아 견딜 수 없었다. 나는 허리를 구부리고 입김으로 데워 주었다. 열심히 데워준 덕분에 기적은 생명보다 빠른 속도로 내 눈앞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집이 열리면서 나비가 천천 히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날개를 뒤로 접으며 구겨지는 나비 를 본 순간 공포는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가엾은 나비 는 그 날개를 펴려고 파르르 몸을 떨었다. 나는 내 입김 으로 나비를 도우려고 했으나 허사였다. 번데기에서 나와 날개가 쭈그러진 채 집을 나서게 한 것이었다. 나비는 필사적으로 몸을 떨었으나 몇 초 뒤 내 손바닥 위에서 죽어갔다."(그리스인 조르바.178)






최명희 소설<혼불.10권>을 읽고 있다. 작년에 사 둔 책인데 올핸 어떻게든 게으름을 떨쳐내고서라도 읽고 싶다.  소설은 전라도 남원 이씨 문중의 종가(宗家)를 이어가는 (종부宗婦)들의 이야기와 소작농들의 삶의 애환이 구수한 전라도 방언속에 그대로 녹아있다.

책을 읽다 보면 진수성찬이라도 내 입맛에 맞는 음식이 있듯  끌리는 문장이 눈에 들어온다. 혀에 착 감기는 맛에 호흡이 편하고 낯선 가운데 뭔지 모를 익숙함이 전해진다. 그런 장면은 시간이 지나고 나면 잊혀지기 쉬워 기억하고 싶어서 밑줄을 긋고 문장 노트에 옮겨 적기도 한다.

 

이 문장은 1권을 다 읽어 가는 말미에서 눈에 띄었다. 소설 속 종부인 청암 부인이 갓 시집 온 손부 효원의 손을 잡고 당부하는 장면이다. 여기서 효원은 할머니의 따순 온기 속에서 추상 같은 기운과 절절한 심정을 느끼며 무너져 가는 종가를 지켜내야 하는 종부의 자리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된다.

 장면에서 떠오른 책이 <그리스인 조르바>. 다 아다시피 <그리스인 조르바>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장편소설이다. 너무나 유명해서 스테디셀러로 읽혀지고 있는 고전이다. 이 책은  아주 오래 전에 문학 읽기 모임에서 정독한 적 있다. 그후로도 한 번 더 읽기도 했다. 그래서 이 문장이  책을 슬며시 끌어 당겼는지도 모르겠다.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가져온 문장은 주인공인 '나' 가  크레타 섬에서 조르바와 지내며 새해를 맞은 아침에 자신을 돌아보며 회한에 젖는 장면이다.


이야기는 다르지만 참 신기하고도 놀랍다. 생면부지의 두 작가(최명희, 니코스카잔차키스)가 어떻게 작품 안에 시간에 의한 삶의 조응 이렇게 풀어낼 수 있지. 독자인 나로서는 아이러니고 놀라울 따름이다. 같은 문장도 읽는 이마다 해석이 다 제 각각이겠지만, 세상 일엔 순리와  때가 있다는 것, 때를 위해서는 서둘지 말고 영원한 리듬에 따라야 한다는 진리를 두 작가는 수수께끼처럼 언어 속에 숨겨 둔것 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