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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명흔 Jan 10. 2024

23  이성복 시인의 '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

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

이성복 시인

 

 

불 끄고 자리에 누우면 달은 머리맡에 있다. 깊은 밤하늘 호수에는 물이 없고, 엎드려 자다가 고개 든 아이처럼 달의 이마엔 물결무늬자국. 노를 저을 수 없는 달은 수심 없는 호수를 미끄러져 가고, 불러 세울 수 없는 달의 배를 탈 것도 아닌데 나는 잠들기가 무섭다.

 

유난히 달 밝은 밤이면 내 딸은 나보고 달보기라 한다. 내 이름이 성복이니까, 별 성자 별 보기라고 고쳐 부르기도 한다. 그럼 나는 그 애 보고 메뚜기라 한다. 기름한 얼굴에 뿔테 안경을 걸치면, 영락없이 아파트 12층에 날아든 눈 큰 메뚜기다. 그러면 붉은 꽃 꺾어 달라던 水路夫人보다 내 아내 못할 것 없지만, 내게는 고삐 놓아줄 소가 없다.

 

우리는 이렇게 산다. 오를 수 없는 벼랑의 붉은 꽃처럼, 절해고도의 섬처럼, 파도 많이 치는 밤에는 섬도 보이지 않은, 절해처럼.

 




​<시시콜콜> 달은 어둔 밤을 밝히기도 하지만 고단했던 사람들의  마음을 풀어주는 것도 같다. 눈 씻고 보아도 보이지 않는 토끼를 달밤에는 보이게도 하고 그 토끼가 내 안으로 오기도 한다.


아버지와 딸이 달 밝은 밤에 누워 도란도란 말 따먹기를 하는  풍경 덕분에 절로 웃음이 나온다. 아버지의 존함을 친구를 놀리듯 함부로 불러도 되고 딸의 외모를 걸고넘어지는 아버지와 딸의 장난스러운 말투도 달뜬 밤이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을까.


가족이 한 지붕 아래 살면서도 각자의 공간에 갇혀 얼굴 보고 말 섞기도 어려운 즈음인데, 나란히 누워 달밤의 정취를 함께 나눌 수 있다니, 상상만으로도  기분 좋아지는 詩다. 그 여운이 좋아 혹시나 하고 창밖내다본다.


 달은 안 보이고 가로등 불빛 아래 눈발이 날린다. 눈 오는 밤에 달이 뜬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어쩌랴. 옛사람들의 풍류를 빌릴 수밖. 달은 하늘에 하나, 호수에 하나, 정자에 하나, 임의 눈 속에 하나, 내 마음에 하나 떠 있다 하니 이 중의 하나를 그리워할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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