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B대신 HB로만 그려봤다. 손끝이 기억하고 있는 부드러운 도라지 꽃잎의 촉감을 연한 심으로 표현해 보고 싶었다.
어느 날 엄마 따라 도라지 밭에 갔다가 그만 손맛을 알아 버렸다. 탱탱하게 부푼 꽃망울 하나를 장난 삼아 살짝 터트려 본 것이 발단이 되어 그 해 도라지밭 하나를 나 혼자 다 해 먹어 버렸다.
경쾌하게 나는 뻥'소리에 그만 중독되고 말았다. 엄지와 검지로 누르면 한 껏 부푼 꽃망울이 손가락의 압력에 의해 뻥, 소리를 내며 터지는데 그 묘한 쾌감을 어떻게 설명할 길이 없다. 아직도 기억한다. 마당가 주름투성이 꽈리를 터트릴 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좋았다.
그 손맛을 기억하고 있어서일까. 지금도 택배가 오면 상자 속 상품보호용 에어 비닐을 어린애처럼 톡톡 터트리곤 한다.
좋게 말하면 호기심 많은 아이지만 어른들 눈엔 참 시망스런 아이였다. '시망스럽다'는 전라도 사투리로 몹시 짓궂다는 뜻이다. 오빠들 사이에서 선머슴아처럼 자랐다. 오빠들이 하는 전쟁놀이에도 난 항시 끼었고 자치기도 잘했으며 나무 타기를 좋아해 소나무를 올라가다 발을 헛디뎌 떨어진 상처 자국이 지금도 훈장처럼 등에 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시망스런 소행?을 엄마는 알면서도 모른 척 눈감아 줬을까. 시계추처럼 엄마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물심부름도 하고 혼자 밭일하는 엄마를 심심찮게 했을 테니까.
그것 때문인지 다른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우리 집 도라지 농사는 해마다 그리 신통치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에 와서 드는 생각이지만 꽃 한 번 제대로 못 피워본 도라지에게도 미안하다.
2주 전 감기몸살로 심하게 앓았다. 병원에서 처방받은 약이 별 효과가 없어 한살림에서 도라지 분말과 도라지청을 사 와 먹기 시작했다. 낮엔 멀쩡하다가도 밤 되면 성해지던 기침이 많이 잦아들었다. 도라지 효과를 본 것이다.
시망스런 내 손에서 피워보지도 못한 게 맘이 켕겨 선심 쓰듯 도라지 꽃 한 송이는 활짝 핀 모양을 그렸고 또 한 송이는 부풀 대로 부푼 꽃망울을 그렸다. 이제 조금 마음이 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