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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명흔 Jul 18. 2023

05   박은영 시인의 '브라자'

 


브라자

박은영 시인

촌스런 소재의 이름이다 그 흔한 꽃무늬는 없지만 도청 광장의 깃발이 되어 날려도 아무렇지 않을, 함성을 따라 흔들리는 바람의 무덤이다 지금은 텅 비었으나 버리지 못하는,

해질 때까지 떨어지지 않고 삶을 지탱한 질긴 끈의

낙하산,

엄마는 늘 비상사태로 살았다

시집 <구름은 울 준비가 되었다. 2020>. 29쪽의 시.



시 마지막 구절에서 울컥, 엄마 생각이 났다. 엄마의 '브라자' 때문이다. 엄마는  언제, 가끔, 브라자를 했을까.


 해 뜨자 해 질 때까지 들밭에서 사느라 엄마는 브라자 말고 땀에 찌든 런닝구로 평생을 사셨다.

큰 언니가 사 준 꽃무늬 브래지어는 장롱지기였다. 엄마한텐 어쩌다 좋은 자리에 갈 때 차려입는 입성 같은 것이었다. 엄마한테 좋은 자리란 읍내 장이나 연중행사로 뽀글뽀글 파마하러 가는 미장원이다.

그런 날 엄마는 대게 호사스러워했다. 호미 자루 놓고 새집처럼 응등한 머리에 동백기름도 바르고 장롱 속 나프 탈렌 냄새가 밴  입성에  꽃무늬 브라자를 차려입은 그 어느 날의 엄마는 모처럼의 나들이다. 엄마한테선 좋은 냄새가 났다. 일년중 그런 날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렇게 살다 여든 훌쩍 가셨다. 엄마의 유품 정리를 하면서 알았다. 엄마도  뽕브라 보면 봉긋하게 가슴 설레는 여자였다는 걸. 엄마의 장롱 속에는 언니들이 사 준 블라우스며 원피스, 당신이  두고 일하느라 입을 새 없어 못 입고, 아끼느라 안 입은 옷들 속에 상표도 떼지 않은 여벌의 레이스 브라자가 들어 있었다.

엄마도 예쁘게 차려 입고 봄이면 꽃놀이도 가고 가을 이면 아버지랑 나란히 동부인해 단풍구경도 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엄마는 자식들 앞에서 늘 삶에 흔들리고 펄럭이는 깃발이 되어 '늘 비상사태로 살'다 가셨다. 농지기와 레이스브라자는 큰언니가 간직하고 있다. 어언 일흔 둘이나 된 큰  언니는 그 걸 보며 엄마를 기억하겠지. 엄마 가신 지 올해로 5년 째다. 시골 가면 나는 일복으로 엄마의 몸뻬 바지를 즐겨 입는다. 고무줄 허리에 당기고 조이지 않아 일하기에 더 없이 편하기도 하지만 왠지 모르게  그걸 입으면 든든하고 만만하다.

아침에 박은영 시집을 펼쳐 놓고 읽다가 오랜만에 입에 담아 보는 '브라자'라는 말에 엄마가 그리워 왼쪽 가슴께가 씀벅 씀벅거린다. 외출했다 들어오면 단박에 벗어 버리는 답답한 브래지어를 '브라자'로 읽으니 시인의 입을 통해 돌아가신 엄마가 하는 말 같아서 시 읽다 나도 모르게 웃다  왈칵한다.


*사진출처: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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