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우리 몸 어딘가에 집을 짓고 산다. 더러는 그곳이 척추 어딘가 깊숙한 곳이어서 면역력이 떨어질 때마다 기억이란 놈이 몸을 뒤채서는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기도 하고, 더러는 손톱이나 발톱, 혹은 머리카락이어서 그것들을 깎거나 자를 때마다 기억 또한 조금씩 혹은 뭉텅이로 잘려 나가기도 한다. 또 더러는 가슴 언저리에 자리하여 그곳이 아릴 때마다 한 방울씩 눈물샘을 채워서는 소리도 없이 흘러넘치기도 하고, 더러는 발바닥이나 겨드랑으로 옮겨가 제 숙주를 실없이 웃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정작 가장 지독한 기억은 아무런 기미나 흔적도 드러내지 않은 해 우리가 먹는 밥을 나누어 먹으며 목숨이 다할 때까지 묵묵히 우리와 함께 하는 녀석이다. "(기억의 집. 127쪽)
김정선에세이 <오후 네 시의 풍경>중에서. 20년 넘게 교정 교열자로 살아온 작가의 일상 이야기 60편의 에세이를 묶은 책으로 저자는 오후 네 시를 시차 적응에 실패한 여행자로 살아온 자신에게 잘 어울리는 시간이라고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