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자야, 너는 이 할미가 너에게 쏟은 정성과 사랑을 갚아야 할 은공을 새겨둘 필요가 없다. 어느 화창한 봄날 어떤 늙은 여자와 함께 단추만 한 만들레꽃내음을 맡은 일을 기억하고 있을 필요도 없다. 그건 아주 하찮은 일이다.
나는 손자에게 쏟는 나의 사랑과 정성이 갚아야 할 은공으로 기억되기보다는 아름다운 정서로 남아 있길 바랄 뿐이다. 나 또한 사랑했을 뿐 손톱만큼도 책임을 느끼지 않았으므로.
내가 불태운 것만큼의 정열, 내가 잠 못 이룬 밤만큼의 잠 못 이루는 밤으로 갚아지길 바란 이성과 사랑, 너무도 두렵고 무거운 책임감에 짓눌려 본능적인 사랑 또한 억제해야 했던 자식 사랑..., 이런 고달픈 사랑의 행로 끝에 도달한, 책임도 없고 그 대신 보답의 기대도 없는 허심 한 사랑의 경지는 이 아니 노후의 축복인가."(민들레 꽃을 선물 받은 날. 148쪽)
박완서 작가의 10주기 에세이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중에서. 박완서 작가의 10주기 대표 에세이는 작가가 세상에 내놓은 660여 편 중 가장 글맛 좋은 35편을 묶었다. 작고한 지 이미 12년이 지났지만 글을 읽고 있으면 여전히 생존해 계신 듯하다. 작가는 작품 속에서 영원히 산다는 말이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