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 모든 것은 내 마음에서 비롯된다.
원효대사가 당나라로 유학을 가던 길에 갈증을 해소해 준 물이 해골 속에 담긴 썩은 물이었다는 이야기는 너무 유명하다. 간밤에 시원하게 마신 물이 해골물이었다니, 얼마나 혐오스럽고 괴로웠을까. 그러나 그 순간 원효대사는 깨달았다. 외부 사물 자체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신의 마음이 문제였다는 것을. 세상의 모든 경험과 감정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결국 내 마음이 만들어낸다는 뜻이다.
이 말대로라면 나를 둘러싼 환경은 문제가 없다.
육아와 일의 병행도, 어린이집 다니는 꼬맹이 둘의 케어도,
딸이 아픈 날 미처 치우지 못한 집안일에 잔소리하는 친정엄마도,
위험한 장난을 해도 그저 웃으며 말리는 시늉만 하는 친정아빠도,
아이들 저녁까지 챙기고 지친 내가 반찬 하나로 대충 밥을 먹을 때,
‘뭐 먹으면 돼?’ 하고 묻는 남편도.
문제는 상황이 아니라, 내가 그 상황을 어떻게 바라보고 반응하느냐다.
가령 집이 지저분하다고 잔소리하는 엄마에게
“내가 알아서 할게요!” 하고 퉁명스럽게 말하기보다
“아, 깜박했네. 이것만 끝내고 치울게요.”
웃으며 말하는 것이다.
남편이 저녁거리를 묻는다면
“저기 프라이팬 위에 있어.” 하고 짧게 끝내기보다
“오늘도 고생했지? 인덕션 위에 있어. 반찬 꺼내줄게.”
따뜻하게 답하는 것이다.
마음먹기 나름, 참 쉽다.
그런데 이 '좋은 마음'을 먹기 위해서는,
‘마음의 상태’, 그 중에서도 여유 있는 마음이 먼저다.
원효대사는 유학길을 가는 여행 중에 겪은 일이라고 했다.그에게는 일과 육아로 찌든 일상도, 잔소리하는 어른도 아침부터 밤까지 돌봐야 하는 아이도 없었다. 어떻게 보면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단순하고 여유 있는 마음의 상태였기에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마음먹기 나름'이 가능하려면 여유가 필요하다. 쫓기고 바쁘고 지치고 화나는 상황에서는 결고 좋은 마음이 나올 수 없다.
직장에서 바쁠 때 “차 한잔하고 하지.”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바쁘다고 몰아치면 오히려 문제가 생긴다. 급한 마음은 아드레날린을 분비시켜 뇌에 스트레스 신호를 보내고 상황 지각을 흐리게 만든다. 그러다 보면 작은 실수도 크게 번지기 쉽다.
따뜻하거나 시원한 차 한잔은 급하게 울리는 화재 경보를 꺼주듯, 교감신경계를 진정시켜 준다.
“괜찮아. 천천히 하라고.”
3분 남짓한 티타임, 몇 모금뿐인 커피 한 잔.
그것만으로도 마음의 평화를 되찾고, 뭐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기세가 생겼다.
밖에서의 나는 스스로를 잘 컨트롤했다. 필요한 일이 무엇인지, 무엇을 먼저 해야 할지, 어떤 방식으로 처리할 지 순서를 정해 착착 해냈다. 잠깐 쉴지, 동료와 대화를 나눌지 스트레스 해소 방법을 빠르게 선택했다.
“육아하는 엄마 맞아?”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빠르고 완벽하게 일했다.
사회인으로서 나는 분명히 인정받았다.
하지만 집에서는 달랐다.
엄마로서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는 이유로 나는 단 한순간도 나에게 여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하원한 아이들이 퇴근한 엄마를 반기면, 잠시 안아주고는 곧바로 '육아 근무'에 복귀했다.
씻기고, 정리하고, 밥을 차리고, 약을 챙기고…
모든 것은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저녁을 다 먹고 TV를 보는 아이들 옆에서 나는 허겁지겁 한 접시에 밥과 반찬을 우겨 넣었다.
그리고 곧장 다음 날 입힐 옷과 가방을 챙긴다.
양치질 시간, 아이들은 약속을 잘 지키지 않았다.
“이거 마지막이야. 이거 끝나면 엄마처럼 양치질하는 거야.”
아이들은 대답하지만, 약속이 지켜지지 않는 날이 더 많았다.
“하나만 더 보자.”, “조금만 더 놀게.”
달래다 보면 다른 아이가 또 떼를 쓴다.
결국 경고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지금 안 하면 엄마 화날 거야. 웃을 때 얼른 해!”
시간의 여유가 있었다면,
아이들이 조금만 스스로 해줬다면,
나를 도와줄 누군가 있었다면… 나는 화가 덜 났을까?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처럼, 나에게는 무엇보다 여유가 필요했다.
양치질이 조금 늦는다고 큰일 나는 것도 아니고, 집에 장난감이 조금 어질러져 있다고 세상이 무너지는 것도 아닌데. 그 순간 물 한잔 마시며 숨을 고를 수 있었다면.
그렇게 나를 다시 식히고, 마음을 가다듬고
무엇을 먼저 해야 하고 나중에 해도 되는지 차분히 호흡을 다듬을 걸.
“얘들아~ 엄마 커피 한 잔 마시는 동안 각자 하던 거 마무리하기야. 다 끝낸 사람은 스스로 정리하고 양치질하자. 알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