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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선 발라주는 사람

by 훈연

한때 내 이상형은,

생선을 잘 발라주는 남자였다.

정교한 젓가락질로 뼈와 살을 잘 바르는,
세심하게 가시를 제거해 살만 척하니 내 밥숟갈에

올려주는 사람.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첫 남자친구는 괴상한 젓가락질을 하던 사람이었다.
자상했지만 젓가락 기술은 탈락.

그다음도 거의 비슷했다.

단지 따뜻한 마음만 있어선 안 되었나 보다.
내용과 표현의 조화랄까?

따뜻한 마음을 능숙한 젓가락 기술로 보여줘야 했다.


전 남자친구가 그랬다.
데이트할 때 학교 근처 치킨집에 갔는데,
섬세한 쌍포크 기술로 뼈와 살을 발라 내 접시에 덜어주었다.
그 후로 간 생선집은 뭐, 더 말할 게 없었다.
고급 젓가락 기술로 생선을 예쁘게 발라서 큼지막한 살을 밥 위에 올려줬다.

응, 너 통과.
우리는 결혼했다.

그 사람은 여전히 생선을 잘 바르고
가시와 뼈도 예쁘게 한 곳으로 모아둔다.
그리고 큼지막한 살을 덜어서,

....

..

.
첫째, 둘째에게 준다.

섭섭하진 않다.
나 역시 제법 능숙해진 젓가락질과
젓가락보다 더 정교한 엄지·검지 신공으로
남편보다 더 세밀한 점검을 마친 뒤,
살만 발라 아이들 밥 숟가락 위에 놓는다.

아이가 생선을 먹을 수 있게 된 이후
나의 젓가락 실력도, 생선 살을 바르는 스킬도 일취월장이다.


다시 생각해 보면, 나의 이상형은 우리 아빠에서 비롯되었다. 아빠는 젓가락질의 정석으로 생선을 깔끔하게발라 살만 뭉터기로 내 앞에 놓아주셨다.
그리고는 살이 얼마 붙어 있지도 않은 생선 뼈를,
징그럽다고 내가 먹지 않던 머리며 내장을,
맛있게 드셨다.


우리 아빠의 삶을 내가 이어받고 있다.
아이들을 위해 가시를 바르고 살을 덜어 준다.

당연하다.
내 아이가 오물오물 먹는 모습,
그 볼록한 볼,
“음~ 너무 마시떠요!”

혀 짧은 그 말.

그런 걸 보면, 생선을 바르는 일쯤이야.

뭐가 대수겠는가.


오늘도 생선 바르기 7년 차로
생선구이집에 가서 실력 발휘를 했다.
남편과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각자의 앞에 놓인 생선을 후드려 팼다.
경쟁하듯 살과 가시를 분리해,

각자 맡은 아이의 밥 위에 놓아준다.

“호~ 불어야 해. 뜨거울지 몰라!”
몇 번씩 주의를 주고,
아이가 기다릴까 봐 경쟁하듯 살을 바른다.

유명하다는 맛집.
침샘을 자극하는 지글지글 생선 냄새.

“나는 생선을 바를 터이니 너는 따뜻할 때 어서 먹거라.”
엄마는 생선 가시 바르는 기계가 되어
거북목으로 생선을 공격한다.

아이가 맛있게 다 먹을 때까지 굽힌 허리,

처박은 얼굴을 들지 못한다.

중간중간,
“엄마 시원한 물!”
“엄마, 너무 뜨거워.”

이런저런 요구를 들어주다 보면
맛있는 생선 한 입을,
지글지글 그 고소한 기름맛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긴 일쑤다.


어느 정도 아이가 배부르게 먹으면,
“얼른 먹어.”
권유하는 남편의 말에

아직도 살 한 점은 남아 있는 생선을 쳐다보고,
남편이 건네주는 살을 받아
입에 쑤셔 넣는다.

없는 입맛도 돌게 했던 생선의 기름진 냄새는
어느새 비린 향만 남는다.

다 식은 생선,
파헤쳐진 살들,
아이가 흘린 음식들,
닦아내던 물티슈,
전쟁을 치른 듯한 식탁 위엔

고요만 남았다.


나도 한때는 뭉텅이 살만 골라 먹던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식은 반찬과 남은 음식으로 허기를 채운다.

비릿한 냄새만 남은 손을 씻으며

“생선, 진짜 먹이기 힘들다.”

중얼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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