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아이들을 두고 ‘결핍이 없어서 문제’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전쟁도 독재도 겪어 보지 않은, X세대부터 MZ 세대까지 소위 말하는 젊은 부모들은 아이에게 많은 것을 너무 넘치게 제공한다. 요구하지 않은 것까지, 말이다.
나만 해도 그렇다. 아이가 무언가 불편해 보이면 당장 검색에 들어간다. 책을 읽는데 거북목이 될까 두려워 독서대를 사주고, 옷이 넘쳐 서랍이 닫히지 않지만, 신상옷은 또 사줘야 한다. 냉장고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음식 위주로 칸칸이 그득하다. 새벽이면 배송되는 갖가지 과일과 고기, 종류를 달리해 밑반찬. 뜯지도 않은 반찬을 버리기 일쑤다. 장난감은 입이 아플 정도다. 미니 자동차, 합체용 자동차, 00시리즈 자동차. 정리함으로는 부족해진 자동차들은 결국 커다란 쇼핑백에 담겨 베란다로 추방된다.
처음 정리함이나 옷장을 살 때만 해도 여유 공간이 있었다. 그러나 이내 조금의 틈이라도 있으면 쌓고 넣고 욱여넣고 또 욱여넣었다.
이제 아이들은 자신이 요구하는 게 없는 걸 이해하지 못한다.
"엄마, 귤 줘."
"없어. 어제 네가 다 먹었잖아."
"아냐~ 규울!!! 귤 달라고!!"
"봐봐! 빈 통이지? 다 먹어서 없다니까."
껍질만 남은 빈 케이스를 보여주고 나서야 귤이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지금 당장 자신의 요구가 수용되지 못하는 것에 내성이 생기지 않아서일까? 아이는 떼를 쓰기 시작한다.
"그럼 사과나 포도 줄까? 내일 귤 사줄게."
"아냐! 싫어!! 지금! 지그음!"
아이는 발을 구르고 눈물을 쏟으며 고래고래 소리 지른다. 애가 먹고 싶다는데 별 수 있겠냐고 생각하겠지만 집에는 항상 과일 세 종류가 기본으로 구비되어 있다. 지금도 배, 사과, 포도, 망고까지 아이의 간택을 기다린다. 다른 과일을 먹으면 되련만 아이는 고집을 꺾지 않는다. 보다 못한 할머니가 가게에 전화를 걸어 귤 한 상자를 지금 당장 가져다 달라고 주문하고, 그제야 아이는 떼쓰기를 멈춘다.
"엄마, 조금만 더 있으면 멈췄을 텐데, 과일도 집에 많잖아요."
내가 입을 삐죽하며 볼멘소리를 하면,
"아유, 애가 먹고 싶다고 저렇게 우는데,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귤이 안 나오는 시기도 아니고, 왜 애를 울려?"
"엄마는 나 키울 때도 그랬어?"
아닌 걸 뻔히 알면서 반문하는 나를 보며 엄마가 말한다.
"그때야 돈이 없었지. 시부모 모시느라 니들을 어떻게 키웠는지 생각도 안 나. 그래서 손주들은 금이야 옥이야 키우고 있잖니!"
아닌 게 아니라 할미의 손주사랑은 지극하다. 딸기 한 팩에 2만 원이 넘어 '금딸기'라 불릴 때도 두 손주를 위해 1인당 1팩씩 총 2팩을 척척 사다 바치시고는 했다. 그런 할머니까지 둬서인지 우리 아이들은, 특히 어린 둘째는 내가 '안돼. 집에 많다. 다른 것 갖고 놀자, 엄마 돈 없어"처럼 자신의 요구를 거절하면
"할미돈으로 사면 되지~"를 시전, 내 혼을 쏙 빼놓고는 했다.
욕구가 생기기도 전에 아이 앞에 물건을 대령하는 부모, 아이의 욕구를 무조건 들어주려는 할미까지, 그래서인지 둘째는 떼쓰기 대장이다.
'결핍'이 없으면 물론 좋다. 모든 원하는 것은 다 눈 아래 있으니 불만도 분노도 없는 삶.
그러나 손안에 모든 걸 쥔 세상이 과연 행복하기만 할까?
더욱이 그 세상이 타인의 노력과 희생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말이다.
아버지 세대가 하는 말처럼 '읎이(없이) 살아야 남다른 결의가 생기고, 독하게 살아남는 것'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부유한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 중에서도 끝없는 열정과 도전으로 성취해 내는 사람은 많으니까 말이다.
다만, 결핍이 강한 동기로 작용하는 것은 분명하다.
내게 없는 것을 갖고자 하는 마음. 내 빈틈을 채우고 싶은 마음. 모든 성취나 성장, 성숙은 다 그런 욕구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결핍이 꼭 나쁜 건 아니다.
빈칸은 욕망의 시작이 되고, 욕망은 결국 성장을 부른다.
나의 빈틈을 채우고 싶은 마음, 그것이 우리를 조금씩 나아가게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