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식하면 용감하다 -
다행히 코로나 확진자 수는 20년 12월 2.7만 명을 정점으로 찍고 감소하기 시작했다.
새해가 되자 1.6만 명으로 줄어든 확진자 수는 21년 2월 1.1만 명까지 줄어들었다.
진정되는 분위기에 정부도 사회적 거리 두기를 완화하기로 결정하였다.
수호 부모님은 1년 동안 버틴 보람이 있다며 다시 중국인들도 들어올 것이고, 조금씩 바빠질 것이라 기대하고 계셨다.
하지만 수호의 생각은 달랐다.
1년 동안 이렇게 온 가족이 한 사업장에 묶여있다 보니 또다시 이런 위기가 올 수 있겠다는 불안감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뿐만 아니라 더욱 걱정된 부분은 중국의 기술이 너무나 많이 발전하여 이제는 한국의 섬유 기술을 뛰어넘는다는 기사를 본 것이다.
코로나로 중국 시장이 봉쇄되었을 때, 우리나라 섬유 시장은 거의 정지 상태였다.
개인 디자이너들이 자신의 브랜드를 만들기 위해 좋은 원단과 재질로 론칭하는 것을 제외한다면 한국에서의 패션산업은 이 시기에 죽어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중국은 달랐다.
자신들의 기술이 뒤떨어지고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내부적으로 끊임없이 노력하고 발전했던 것이다.
코로나가 발생하기 전까지만 해도 패션산업, 즉 옷이나 가죽 제품들은 made in KOREA가 아시아 시장을 지배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 세계가 봉쇄되었다가 풀리기 시작하자 이제는 패션산업에서도 made in CHINA가 왕이 되어갔다. 퀄리티는 한국과 비슷한데 가격은 반값도 안 했기 때문이다.
수호는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여기서 나가야 한다고.
환갑을 앞둔 부모님이 나가서 다른 일을 시작하기엔 무리가 있어 보였고, 이제 막 1층에 가게를 얻어 장사를 시작한 여동생을 내보내기에도 아쉬운 것들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문제는 수호가 몇 날 며칠을 고민해도 본인이 나가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전공을 살릴 수 있는 디자인 계통의 회사들은 사람을 뽑기는커녕 내치기 바빴고, 하루아침에 없어지는 업체도 한둘이 아니었다.
수호네 사무실이 있던 5층 상가도 코로나를 견디지 못하고 그만둔 곳이 셀 수 없을 정도였고, 건물의 4, 5층은 유령이 나온다고 할 정도로 텅텅 비어있었다.
뾰족한 수가 없었기에 매일 복잡하게 생각만 하다가 잠드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렸다.
오늘도 새벽에 일어난 수호는 펑펑 내리는 눈을 보더니 또다시 헐레벌떡 일어난다.
하지만 2년 전과 마찬가지로 금세 마음을 바꾸고는 느긋하게 출근 준비를 한다.
언제나 마찬가지다.
일찍 출근했다고 누가 인정해 주는 것도 아니고, 일하는 시간만 더 늘어날 뿐이니 말이다.
한 가지 달라진 것이 있다면 출근하며 무미건조하게 듣던 라디오나 음악이 아닌, 정보를 습득할 수 있는 부동산 팟캐스트를 청취한다는 것이다.
코로나로 일상이 바뀌면서 수호도 나름 자기 계발이라는 것을 시작했다.
그냥 한가하게 노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으려는 의도도 조금은 숨어있었다.
그리고 집값이 오르면서 자연스럽게 부동산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공부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사무실 주차장에 도착하여 내리려는 순간, 듣고 있던 부동산 팟캐스트에서 수호의 가슴을 뛰게 하는 멘트가 흘러나왔다.
“집에 깔고 앉은 돈이 너무 아깝지 않나요? 실거주로 깔고 앉은 돈을 활용하세요.”
“자산 재배치를 하고 남는 돈으로 투자를 하여 노후를 대비하세요”
오케이! 이거다!
수호는 번뜩 좋은 생각이 들었다.
2배 오른 집을 팔고, 월세로 이사한 뒤 남은 돈으로 사업을 하는 것!
‘내가 왜 이 생각을 하지 못했지? 역시 사람은 공부를 해야 돼’
수호는 들뜬 걸음으로 사무실을 향한다.
이것이 수호에게 어떤 시련을 불러올지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퇴근 후 수호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은채에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며 맥주를 가지고 오라고 한다.
펑!
맥주 따는 소리가 수호의 기대만큼이나 크게 울려 퍼졌다.
“우리 이 집 많이 올랐으니까 팔고 월세로 이사 간 다음에 남은 돈으로 장사 한번 해볼까?”
”오빠, 우리 집 매수한 지 아직 2년 안 지났어! 지금 팔면 양도소득세만 60%라고!! 세금으로 절반 이상을 내야 해!! 경매 배운다는 사람이 아직도 그걸 몰라? 공부를 제대로 하고는 있는 거야?“
”양도소득세?? 들어본 것 같기는 한데... 경매는 세금 다 내면서 한다고 해서 전혀 생각을 못 했네.“
얕은 지식과 수박 겉핥기식으로 배워온 수호의 부동산 공부가 들통나는 순간이다.
수호는 민망했는지 은채 앞에서 고개도 잘 들지 못하고 맥주만 들이켰다.
자신의 공부가 빛을 본다고 했던 생각은 그날 저녁 와이프의 말 한마디에 바로 꺼져버렸다.
사실 경매는 수호에게 잘 맞지 않는 종목이었기에 제대로 된 공부가 진행되었을 리 없었다.
식당에서 메뉴판 달라고 말 한마디 못 꺼내는 성격의 수호가, 법원을 들락날락해야 하고 집주인을 쫓아내야 하는 명도를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부동산 공부는 계속하고 싶었다. 부자는 되고 싶었으니 말이다.
다음날, 수호는 출근하자마자 경매가 아닌 다른 투자 방법을 제대로 공부하자는 마음으로 여러 가지 부동산 교육과정을 찾아보았다.
다양한 교육과정을 찾아보던 중 평소에 듣던 팟캐스트에서 기초반을 모집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강의료가 결코 싼 가격은 아니었지만, 어제처럼 은채 앞에서 더는 쪽팔리고 싶지 않았기에 큰맘 먹고 수강 신청을 했다.
그렇게 수강하게 된 기초반에서 수호는 다시 한번 엄청난 사실을 알게 된다.
그것은 바로 아파트 후순위 담보대출.
하지만 강의에서 나온 후순위 담보대출은 그것을 이용하여 투자하거나 사업을 하라는 내용이 아니었다.
투자자들 사이에서 역전세를 막기 위해 후순위 담보대출을 이용한다는 것이었는데 수호는 그 이야기를 제멋대로 해석한 것이다.
아파트 상승분을 이용하여 후순위 담보대출을 받고 그걸로 사업을 하면 된다는 어쩌구니 없는 생각.
어릴 때부터 대출을 이용해 돈을 벌어야 한다고 들어왔던 것이 지금 여기서 겁도 없이 튀어나온 것이다.
얼마 전에 당한 쪽팔림은 금세 사라졌다.
수호의 원래 천성이 그렇다.
좋은 게 좋은 거고, 물 흐르듯이 유하게 살아온 인생이었다.
이번에도 수호는 자신있게 맥주를 딴다.
펑!
저번보다 더 큰 소리가 난다.
”우리도 대출받아서 장사 한번 해볼까? 집을 안 팔고도 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냈어!“
”후순위? 집 담보로 빚낼 생각 추호도 하지 마! 우리 이 집 살 때 기억 안 나? 대출 빨리 갚자고 만기도 15년짜리로 한 거잖아. 매달 상환하는 금액이 높아서 DSR 때문에 마이너스 통장도 안 뚫려! 그런데 여기다가 후순위까지 받자고? 제정신이야?“
”후순위라는거 알고 있었어? 당신은 대체 그런 거 어떻게 아는 거야?“
”오빠, 경매 강의에 나오잖아! 강사님이 세입자 나간다고 할 때, 돈이 부족해서 후순위 이용했다고! 아니 강의를 들은 거야 만거야?“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였다.
와이프의 거절에 수호는 오늘도 맥주만 마신다.
수호는 은채와 함께 경매 강의를 듣는다.
온라인 수업이었기에 둘이서 한 번씩은 들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본인보다 더 열심히 공부하는 은채 덕분에 오늘도 고개를 제대로 들지 못하는 수호다.
은채는 공기업을 다니고 아주 안정적인 삶을 원하는 여자다.
대출을 더 이상 만들고 싶지 않은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은채 입장에서도 남편과 시부모님, 거기에 시동생까지 줄줄이 엮여 있으니 무작정 반대만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은채는 안정적인 삶을 원하는 만큼 현실적이고 현명한 사람이다.
처음엔 바로 거절했지만 그래도 몇 날 며칠을 같이 이야기하고 고민해 주었다.
그렇게 일주일이 흘러 결국 수호의 생각대로 대출을 활용하기로 결정하였다.
어차피 뾰족한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단, 은채는 3가지 조건을 걸었다.
하나.
스터디카페, 커피숍, 밀키트, 무인 아이스크림 금지.
이런 업종들은 절대 하지 않기로 했다.
집에서 나와 단지 상가만 둘러봐도 벌써 몇 개씩 보이는 것들이었다.
시작하자마자 경쟁하면서 들어가는 그런 업종은 하지 말라는 이야기다.
수호도 당연하다고 생각했기에 다른 업종을 알아보고 선택하기로 한다.
그래서 떠오른 업종이 바로 반찬가게.
수호의 취미는 요리였고, 항상 가족들의 식사는 수호 담당이었다. 결정적으로 한식, 중식, 양식 조리기능사를 가지고 있었기에 반찬가게를 떠올린 수호를 은채도 어느 정도 동의할 수 있었다.
수호가 요리를 배운 것은 와이프와 아이들에게 맛있고 건강한 밥을 만들어 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는데 이것이 업종을 결정하는 중요한 역할이 될 것이라곤 꿈에도 몰랐다.
둘.
대출은 1억까지만 이용할 것.
제2금융권, 제3금융권, 이곳저곳 전화로 대출상담을 받아보았다.
최대 금액은 2억까지 가능한 곳도 있었고, 대부분이 1억 5천까지는 가능하다고 하였다.
집값 상승분이 3억이었기에 아마 2억까지 가능한 곳이 있었던 것 같다.
문제는 금리였는데 후순위 담보대출이다 보니 가장 저렴한 곳이 5%였다.
한국은행 기준금리가 0.5%라는 것을 감안하면 정말 엄청나게 높은 대출금리였다.
2억을 대출받으면 매월 이자만 83만 원.
은채 입장에선 이 부분이 가장 두려웠을 것이다.
우리가 집을 매수할 때 이용한 1.8%의 보금자리론도 무서워했던 은채다.
그런데 5%라고 하니 얼마나 밤잠을 설쳤을지는 안 봐도 비디오다.
하지만 수호는 대출에 대해 너무 무지했고, 대출을 쉽게 생각하는 환경에서 자란 탓에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5%의 대출을 이용하여 15%의 수익을 내면 된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에 가득 찬 상태.
수호의 자신감과 와이프의 걱정이 합의한 금액이 바로 1억인 셈이다.
수호는 1억을 대출받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1억이면 웬만한 가게 하나는 차릴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셋.
금주, 금연할 것.
수호는 결혼하기 전 집에 들어가기 싫어 항상 술 약속을 만들었다고 했다.
문제는 술이 자제가 안 된다.
술은 취하려고 마신다는 게 수호의 생각이었고 자랑거리였다.
수호와 은채는 7년을 만나고 결혼했다.
2010년 독일 월드컵에서 대학교 동기들과 거리 응원을 하였고, 동기 중 한 명이 친구를 데려왔는데 그 친구가 바로 은채다.
언제 만났다고?
바로 2010년이다.
2010년은 수호의 부모님이 사기를 당해 수호가 동굴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하면서 매일 술로 살아가던 시기였다.
은채는 그때부터 7년 동안 수호의 술버릇을 받아준 것이다.
결혼하고도 계속 받아줬으니 족히 10년은 되어간다.
수호에게 있어서 은채는 정말 세상에서 하나뿐인 보석과도 같은 존재다.
10년 동안 100번을 싸웠다면 99번은 수호의 술버릇 때문이었고, 싸웠다기보다 혼난 것이라고 하는 게 맞을 것 같다.
그래서 수호는 은채가 이 조건을 이야기했을 때 솔직히 자신은 없었다.
금연은 자주 시도 했던 거라 어렵지 않았지만 금주라니... 너무 어려운 미션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걸 따질 여유가 어디 있겠는가.
수호는 일단 알겠다고 했고, 은채는 또 한 번 속는 셈 치고 넘어가는 것 같았다.
결국 이렇게 3가지 조건을 약속하고 최종적으로 선택한 업종이 바로 프랜차이즈 반찬가게다.
장사에 대한 개념이나 경험이 전혀 없으니, 프랜차이즈로 도전해 보는 것이 좋겠다고 결정한 것이다.
수호는 새로운 시작을 한다는 생각에 설레면서도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무조건 잘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열심히 최선을 다하고 노력한다면 절대 망하지 않는다는 믿음으로 살아왔고, 부지런함에 있어서는 자타가 공인하는 수호였기에 더더욱 의지가 불타올랐다.
하지만 사람 일이라는 것이 다 그런 것 같다.
본인이 하고 싶다고 정해버리면 주변에서 아무리 충고를 해주어도 귀담아 들리지 않는 법.
그러니 잘못된 선택이 생기고 실패라는 것도 존재하는 것 아닐까.
중요한 것은 그 어떤 실패도 시작 단계에서는 절대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미리 알 수 있다면 누구도 도전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수호 역시 주변에서 해주는 충고에는 귀를 닫은 채 설레는 마음으로 창업 준비에만 열중했다.
서서히 추운 겨울이 지나가고 따뜻한 봄기운이 느껴진다. 수호는 이번 봄기운이 자신에게 큰 선물을 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짧은 2월은 수호에게 큰 희망을 주며 금방 지나갔고 어느새 3월이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