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칼국수집에서 드디어 맞잡은 손
'서울에 집을 사겠다고 하는 거 보니 돈이 좀 있나 보네'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을 위해
미리 말씀드리자면 우리 부부가 가진 재산이라고는 신혼집을 구하기 위해
없는 살림에 빤스까지 탈탈 털어 넣은 작고 아담한 전세금이 전부였다.
물론 그 조차도 있는 게 어디냐고 말한다면 부정할 수는 없지만
내 나이 서른 후반, 아내 나이 서른 중반, 각자의 회사생활 경력을 합쳐
16년이 넘는 시간 동안 모은 돈이라고 생각하면 참... 철없는 자산이었다.
결혼할 때의 자산이 2년이 지나도록 조금의 성장세도 없이 한결같은 금액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우리 부부의 흥청망청한 소비 생활 탓이 크게 기여를 했다.
내일이 없이 오늘만 사는 것처럼, 사고 싶은 모든 것을 사버리는 욜로족은 아니었으나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가끔 술값 내는데 선봉장도 좀 서고
가끔은 옷도 좀 사고 일 년에 한두 번은 해외여행도 좀 가고
퇴근 후에 좋은 안주에 싼 술도 먹고 주말엔 더 좋은 안주에 좋은 술도 좀 먹고
그렇게 적당히 좀 행복에 투자를 하다 보니
월급은 늘 카드값이 좀먹기 일쑤였다.
그러던 우리가 집을 사겠다니 다시 한번 똥이 찔끔 나올 만큼 겁이 나고 황당한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겁 많은 남편이 그저 나올 것 같은 똥을 괄약근 조이며 막고 있을 동안
아내는 이미 성북동부터 혜화동, 서촌까지 부동산을 돌아다니며
괜찮은 가격대의 한옥 후보군을 몇 군데 추려놓았고 주말에 같이 보러 가자고 했다.
겉으론 흔쾌히 알겠다고 했지만 속으론 아직 때가 아닌데...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처음에 간 곳은 혜화동 로터리에서 성북동 쪽으로 가는 길 안쪽에 있는 20평대의 작은 한옥집이었다.
작은 마당이 있고 ㄷ자보다는 작고 ㄴ자 보다는 큰, 그리다 만 ㄷ자 구조의 한옥집은
어릴 적부터 이곳에 살았다는 주인의 취향에 맞추어
프로방스한 느낌으로 부분 부분 꽤 많이 수선되어 있었다.
구조나 위치는 마음에 들었지만 처음 본 한옥집이어서 그런지 좁다라는 생각이 가장 많이 들었다.
아내는 이 정도 가격에 이 정도 크기면 괜찮은 거라고 했지만,
겁도 많고 욕심도 많은 나는 영 마음에 들지 않아 다른 한옥집을 보자고 했다.
예상은 했지만 서울에서 4~5억대에 살 수 있는 한옥의 작은 평수에
적지 않게 실망해 허전해진 속을 부동산 사장님이 추천해준 혜화동 맛집
명륜손칼국수에서 채우기로 했다.
저녁 장사는 안 하고 점심 장사만 그것도 1시 반까지만, 그것도 재료가 소진되면 더 일찍 영업을
종료한다는 그곳은 이미 단골손님들로 만석이었고 꽤 기다린 후에 자리가 나서
얼른 엉덩이를 욱여넣은 우리는 잽싸게 칼국수 두 그릇과 수육 문어 반반 접시를 시켰다.
칼국수는 녹진했고 수육은 촉촉했고 문어는 부드러웠다.
하나하나 기대보다 더 깜짝 맛있어서 얼른 막걸리로 놀란 가슴을 진정시켜주었다.
"혜화동 한옥에 살면 여기 칼국수집은 가까워서 그건 좋겠다"
아까는 좁다고 싫다더니 칼국수집 가까워서 또 좋다는 철없는 남편의 말에
아내의 막걸리 마시는 속도가 빨라진 것은 기분 탓이겠지
아내를 따라 두 번째로 방문한 한옥집은 서촌에 위치했다. 사실 한옥을 사게 되면 서촌에 있는 한옥을
사고 싶다는 생각을 가장 많이 해왔었다. 특유의 고즈넉한 분위기와 곳곳에 숨어있는 서촌 특유의
감성이 느껴지는 샵들, 그리고 내공 있는 막걸리집들 때문에 아내와 데이트 장소로 많이 갔었고
갈 때마다 이 동네에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부푼 마음을 안고 찾아간 서촌의 한옥집은 일단 비쌌다. 그리고 더 좁았다.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축 한옥이어서 깨끗하고 서까래나 나무 기둥의 상태는 좋았지만
대대적인 수선을 계획하고 있는 우리에겐 수선할 필요도 없이 완전한 상태의 한옥이 장점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10평 정도의 좁은 공간에 층고를 높게 하여 다락방이 2개나 있는 재밌는 구조였지만
처음에만 좀 재미있지 좀 살다 보면 불편함만 있을 것 같아 아내와 나는 재빠르게 스캔을 마치고
발 빠르게 그곳을 떠났다.
이후로 몇 군데의 한옥을 더 둘러보고 아내와 나는 처음 봤던 혜화동 한옥이
우리가 가능한 금액대의 가장 적절한 구조와 평수라는 결론에 도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