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2
[XX0531]
“자, 이제 눈을 감고 심호흡을 크게 하세요.”
눈을 감았다 뜨니 5년이 지나 있었다. 머릿속에 갇혀 있었다. 내 옆에는 나, 나와 닮은 얼굴, 눈동자, 입술, 그리고 수많은 신체 부위들이 나란히 줄을 지어 있었다. 생각들은 점을 이루어 까만 선을 칠했다. 누가 극과 극은 닿아있다고 하던데. 새까만 점을 가까이 보면 면이 되었고 또 멍하니 바라보면 백지가 되었다.
문을 열었더니 세상은 바뀌어 있었다. 분명 나뭇가지는 하얀 눈으로 덮여 있었고 하늘은 온통 하얀색이었는데. 새로 생긴 아스팔트 도로와 정류장. 의자에 앉은 저 사람들은 새로운 이웃일까, 어렸던 것이 형태도 못 알아볼 만큼 커져버린 걸까. 다시 문을 닫아 거실을 지나쳐 안방으로 들어갔다. 방안은 놀라울 정도로 그대로였다. 벽면에 걸린 민트색 테두리의 대형 거울. 그 틈 사이로 끼어있는 회색 사진 속 어린아이가 누군지 몰라 한참을 들여다봤다. 거울에 비친 눈동자와 같았다. 미소는 사라지고 주름은 생겼다. 눈만 감았다 떴을 뿐인데. 그저 누워서 눈만 감았다 떴을 뿐인데 바람개비를 들며 해맑게 웃던 여자아이는 생기 없는 눈동자가 되었다.
그 시점부터 나는 죽어 있었고 또 살게 되었다. 누군가는 환경이 널 그렇게 만들었다며, 또 다른 누군가는 유전이라고 떠들어댔다. “애초부터 그렇게 살 운명이었어.” 저 멀리서 환청이 들려왔다. 그는 책임이 없다며 회피했다. 모든 선택은 너에게 달려 있다고. 난 나의 우울을 감싸 안았다.
세상은 조용했다. 시끄러울 땐 눈을 감았고 싫어하는 건 고개를 돌렸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만큼 너를 사랑해 줘” 외치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나도, 남도 사랑할 수 없어 온기만을 찾아 헤맸다. 나에게 사랑은 어려웠다. 그럼에도 그게 참 애틋하다. 가장 불편한 상대를 유일하게 신뢰한다면 그건 무슨 이름으로 정의 내릴 수 있을까. 사랑할 수 없다면 버리라는 말을 쉽게 하는 사람이 되지 못해 오늘도 가만히 눈을 감는다.
*
‘31‘
책상에 놓인 일력을 바라봤다. 그 아래는 작은 글씨로 질문이 적혀 있었다.
‘기쁠 때 끌어안고 싶은 사람이 있어?’
누구였더라..
곰곰이 그 이름을 생각해 봤다. 혁, 맞아 혁이었지. 십 년을 같은 학교를 다니며 지냈는데 그 이름을 새까맣게 까먹고 있었다니. 졸업한 이후로 네 이름과 같은 사람을 본 적이 없어서 그런가. 아무튼 난 널 잊고 싶었는데 정말 그럴 수 있었구나.
혁은 고아인 내게 처음으로 가족이 되어주겠다던 사람이었다. 가끔 뜬금없이 생각에 빠진 표정으로 삶에 대해 묻기도 했다. 그럼 나는 “넌 나보다 인생을 더 살아본 것 같아” 라고 말하며 웃었다. 그와 이별한 이유는 단순했다. 마음을 모두 써 버려서. 마음이 없는데도 눈물이 난다는 건 참 이상했다.
- 너 덕분에 사랑하는 법을 배웠어.
혁의 마지막 말이었다. 고마워 혁아, 난 너 덕분에 사랑받는 법을 배웠어.
*
깜깜했던 하늘이 노란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감고 있던 눈을 뜨니 잠시 어지러웠다. 초점을 맞추기 위해 앞에 있는 일력을 바라봤다. 6월이었다. 벽에 걸린 달력을 찢었더니 새로운 숫자가 반겨주었다. 멈춰있던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생각은 알맞은 글자를 찾아 자리를 옮겼다. 자 이제 일을 해야지, 맞지 않던 균형이 서서히 모여 겹을 이루었다.
난 한동안 그 이름을 잊고 살 테다. 사랑을 주고받던 감정만 남아있겠지, 그 이름이 무엇인가 다시 헤매는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