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역줄기무침
케냐에서의 삶이 거의 3년이 되어 그간 머물던 집에서 나와 귀국 전 임시숙소인 게스트하우스에서 묵고 있다. 작은 텃밭을 끼고 있는 이 게스트하우스는 마치 시골 할머니댁에 쉬러 온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하고, 지친 심신을 위로할 수 있는 정서적 위로 공간처럼 느껴지기도 하다. 도심이지만 인근에서 밤낮없이 들리는 개 짖는 소리, 새벽이면 잠을 깨우는 새소리, 문을 열고 나가면 텃밭의 여러 가지 채소들, 그리고 이 집을 지키는 강아지와 여러 마리의 고양이들. 모두 여유로우면서 분주한 하루를 시작하고, 지내고 그리고 마무리한다.
매일 아침 7시가 되면 어김없이 준비해 주시는 정갈한 아침 밥상.
어제는 숟가락을 들기 전, 한국에 있는 가족으로부터 얼마 전 돌아가신 엄마의 집을 다 정리했다는 연락과 이제 엄마가 자유롭게 다니도록 해드리자는 메시지를 받았다. 내 앞에는 따끈한 북엇국이 놓여 있었고, 타지에 홀로 있는 나를 애처롭게 생각하는 가족에게 '나는 이렇게 잘 먹고 지내'라며 그 밥상 사진을 찍어 보내주었다. 분명히 요동치는 마음을 아닌 것처럼 장황한 문자로 괜찮다 설명하는 것보다 그 사진을 보내는 게 나에 대한 걱정을 덜 게 해주는 더 나은 방법일 거라 생각했다. 사진을 보낸 후,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북엇국이 식기 전에 몇 술 뜨고 무거운 걸음으로 그곳을 나왔다.
오늘 아침 7시, 역시나 나만을 위한 아침밥상.
계란과 파가 담긴 국은 옅은 노란색을 띠며 눈으로도 그 따뜻함이 전해왔고, 식탁에 놓인 반찬들은 마치 내 건강을 챙기기 위해 고민한 식단처럼 준비되어 단출하지만 골고루 놓여 있었다. 유독 눈에 들어온 '미역줄기볶음', 나의 어린 시절, 매서운 겨울마다 함께 했던 그 미역이 곱게곱게 조리되어 내 밥상에 놓여 있었다.
허름한 집, 우리 다섯 식구는 새벽 1-2시쯤 일어나 전구를 켜고, 촛불을 켜고 주섬주섬 두꺼운 옷을 챙겨 입은 채 집 마루에 앉아 미역 포자를 끼웠다. 인부를 구할 수 있는 형편이 안 되었고, 보모님 두 분이 하기는 버거운 일이라 우리 삼 남매도 졸린 눈을 비벼가며 그 일을 함께 했다. 새벽 동이 트면 부모님은 포자를 잔뜩 끼운 것을 들고 바다로 나갔고, 우리 셋은 집을 나와 걸어서 1-2시간이 족히 걸리는 학교로 향했다. 그리고, 그 포자가 겨우내 자라 수확이 가능해지면, 우리는 다섯은 이제 새벽의 거친 바다로 나가 미역을 베어 바로 공장에 팔거나 혹은 익혀서 팔거나, 익힌 것을 말려서 팔거나... 그 상황과 여건에 따라 다양한 방법으로 매 해 겨울을 매서운 바닷바람 속 여러 형태의 미역과 함께 지냈다.
종일 노동에 시달리다 돌아온 엄마가 팔다 남은 혹은 버리기 아까운 미역줄기를 주섬주섬 모아 반찬으로 내어오면, 그 시절 나는 맛있는 반찬을 해달라고 투정을 했던가, 아니면 맛있다며 연신 먹었던가. 계란이 반찬으로 올라오기만 해도 너무나 행복하고 맛있게 먹던 기억, 모처럼 밀린 미역값을 받아 집에 돈이 생겨 엄마가 삶은 계란이나 계란 프라이를 여럿 해주셨을 때는 기억이 있으나, 저 미역줄기무침에 대한 맛은 별 기억이 없다, 그저 겨울을 온몸으로 맞았어야 했던 가난 속 추위에 떨던 우리의 그 시절만 느껴질 뿐이다.
아이가 계란이 먹고 싶다는 걸 너무나 잘 알았을 엄마는, 버려진 미역 속에서 그나마 반찬으로 만들 수 있을법한 미역줄기를 골라내야만 했을 때 바닷가의 그 차갑고 잔인한 겨울바람을 어떻게 견뎌냈을까. 힘겨운 노동으로 굽은 등과 추위에 곱은 손가락은 미역줄기를 익힐 때의 온기에도 펴지지도 녹지도 않았을 그 삶을 어떻게 버텨냈을까.
나는 식탁에 놓인 하얀 접시의 미역줄기 반찬을 한동안 바라보다 조용히 밀어내고는, 따뜻한 계란국에 밥을 적셔 입에 넣었다. 어린 시절 먹고 싶다고 해달라고 조르던 계란은 꿀꺽 삼켰으나, 엄마의 애처로움이 느껴졌던 미역줄기무침은 그저 바라만 보고 싶고, 그저 가만히 두고 싶었다. 그 시간이 오늘 집밥, 내 식탁에서 멈춰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