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역국
젊은 아이들 사이에서 설레는 밀당을 하며 한참 청춘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귀찮게도 전화벨이 울렸다. 저 전화를 받으면 이 청춘의 두근거림이 순식간에 살아질 것 같아 못 본 척 못 들은 척했으나, 결국 마지못해 "여보세요". 잔잔한 시냇물을 조약돌로 두드리는 듯 고요하나 잔잔하게 뛰던 심장이 이내 커다란 바위를 바다 한가운데 떨어뜨린 것처럼 '쿵'하고 주저앉았다. "엄마가 위독하셔서 지금 중환자실로 들어가셨다, 빨리 와라" 누구와 통화한 것인지는 기억에 나지 않고 부서질 것 같은 심장을 움켜쥐고 무작정 달려 나갔는데 저 쪽에서 엄마가 웃으며 걸어왔다. "막둥아, 엄마 괜찮아". 휴.......... 다행이다.
아니, 다행히 아니었다. 그건 꿈이었으니까.
엄마는 극심한 통증으로 누군가의 도움으로 병원에 갔다가 무탈히 나온 게 아니었으니까.
엄마는 12월 마지막 날, 홀로 외롭게 그 먼 길을 떠난 것이니까.
새벽에 그 꿈을 꾸고 눈을 떠보니 새벽 3시가 조금 지난 시간, 여전히 심장은 요동치고 있었고, 엄마가 위태롭다는 두려움 - 살아왔다는 기쁨 - 그리고, 그건 그저 꿈인 것이어서 지금 내게 위급한 상황의 엄마도, 건강한 모습의 엄마도 없는 그저 "부재"의 공간에서 나 혼자 그 어둠을 견디고 있었다. 꿈도 현실도 구분이 되지 않은 새벽의 시간에 경박하게 뛰는 심장을 쓸어내리며 엄마의 부재를 인정하기 싫어 두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문 밖에 들리는 쉼없는 개 짖는 소리, 풀벌레 소리, 저벅저벅 텃밭을 가꾸는 일꾼들의 여유 있는 걸음 소리는 새벽이 다 닳아 아침이 오고 있음을 느끼게 했고, 나는 마치 무조건 지켜야 할 약속처럼 7시가 되자 아침식사를 위해 안채로 들어가 밥상에 앉았다. 깔끔한 사기 접시에 담긴 몇 가지 반찬이 차려진 후 약간의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따끈한 국물이 내 앞에 놓였다, 미역국 -
아무리 생각해 봐도 엄마의 생일을 제대로 축하해 본 경험이 없다. 그나마 우즈베키스탄에 머무를 때 아이를 돌봐주러 왔던 엄마와 함께 넙적한 현지 전통빵 가운데 둥그런 조각케이크를 놓고 조촐하게 생일축하 노래를 불렀던 그게 지금 기억나는 유일한 엄마의 생일파티. 수십 년을 살아온 인생인데, 맛나게 끓인 미역국 하나 놓인 배부른 밥상을 엄마를 위해 차려본 적이 없다, 이런 내가 감히 엄마를 내 우주였다고 말할 자격이 있는 것인가.
먹을 것도 입을 것도 모든 게 다 한참이나 부족하고 없던 시절에도 흔해빠지고 사방에 널린 것이 미역이었는데, 생일이 추석 전후라 그나마 먹을 게 풍족한 시기였는데 생을 축복하고 기뻐하면서 후루룩 들이킬 미역국 한번 받아본 적이 없었을까. 평온한 일상을 평범하게 채우던 그 시절의 조촐한 밥상에 소고기는 아니더라도 계란이라도 풀어 따끈하게 속을 데워줄 미역국 한 그릇 해먹을 여유가 없었던 것일까. 생을 축하한다는 것이 가난한 집 밥상에 어울리지 않게 덩그러니 올라온 비엔나 소시지 몇 조각처럼 우리 집과는 어울리지 않는, 엄마에게는 어쩌면 사치와도 같은 불편한 손님과도 같은 것이었을까.
그래도 꿈에 엄마가 나왔고, 엄마가 죽을 고비를 넘긴 후 '살아서' 내게 왔다, 그리고 그 꿈 속의 엄마는 '나는 괜찮다'하시며 꺼이꺼이 오열하는 나의 등을 도닥여주었다. 엄마가 그 먼 강을 건너지 않고 내게로 와 다시 태어나주었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표정으로 다시금 내게로 와 주었다. 그 탄생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오늘 아침 내 밥상에는 미역국이 올라왔고, 다만, 다시 내게 와준 엄마는 사실 현실이 아닌 꿈이었다는 절망감에 목이 메어 쉬이 그 국물을 넘기지 못했다.
엄마의 삶이 미역국처럼 쉬이 미끄러져 그대로 저 건너편으로 건너갔다는 것을 여전히 나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