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탈주하는 아이들 2
이른 아침 길을 나서는 ‘감성 편지형’ 학생과는 반대로 오로지 야밤이 되기만을 기다리다 탈출을 감행하는 아이들도 있다. 사실상 이 학생들의 경우 ‘탈주자’라는 표현보다는 단지 몇 시간 동안 ‘외출 자’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이 학생들의 목적은 자유도 아니고 그리운 집도 아니다. 오로지 식욕. 극심하게 굶주려 먹을 것을 찾아 헤매는 하이에나 무리처럼 그들은 먹을 것을 찾아. 아니, 편의점을 찾아 허기진 걸음을 터벅터벅 옮긴다.
기숙 학원의 저녁 식사시간은 세상의 관념을 따르지 않는다. 오후 5시 30분. 이른 저녁 식사를 하고 나면 잠자리에 드는 11시 30분까지 배고픔을 견뎌내야 한다. 대부분의 기숙 학원이 오후 9시 30분에 간식 시간이라는 것을 운영하지만 그 간식이라는 것이 당연하게도 부실하기 마련이다.
부모의 직업이 판사인 아이도, 의사인 아이도 기숙 학원의 간식 시간에 유통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빵을 먹어야 한다. 주간 식단표의 형편이 좋지 못할 땐, 작디작은 몽쉘통통 하나에 음료수 캔 하나로 이제 갓 20대가 된 남자 아이들의 혈기 왕성한 위장을 달래줘야 한다. 아이러니한 것은 부당함은 그리고 부족한 간식은 부모의 직업이 무엇이든 공평하게 주어진다는 것이다. 어쩌면 부당함이 가장 넓은 범위의 평등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악한 측면에서 말이다. 결국, 굶주림에 굴복한 아이들이 부당함에 대항하기 위해 편의점으로 긴 여정을 떠난다. 기숙 학원은 대부분 산에 있기 때문에 긴장되고 긴 여정의 길은 짧게는 한 시간 길게는 두 시간이 걸린다. 야밤에 기숙사를 나와 – 아이들은 무슨 수를 쓰든 탈출하고 만다. 절대 선생님들이나 기숙사 사감 선생님의 잘못이 아니다. - 돌아오는 학생들은 아침 수업에 무조건 졸게 되어있다. 아침에 주기적으로 조는 아이들과 긴밀하게 대화를 시도해보면 열이면 열. 야밤에 은밀한 작전을 펼친 아이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완벽한 계획이 존재했다면 그런 완벽한 계획을 실행한 사람들에 의해 수많은 책이 쏟아져 나왔을 것이다. ‘완벽한 계획의 기술’, ‘미라클 플랜’, ‘계획은 습관이다.’와 같은 제목은 다르지만, 책의 중반 즈음이 되면 내용이 비슷비슷해지는 그런 책들 말이다. 완벽이란 단어는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 실제를 말한다. 그 실제를 말하는 자신이야 말로 완벽 그 자체라 한다면, 완벽한 계획이란 결국 자신감과 동의어가 된다. 나의 계획이 완벽할 것이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야말로 수많은 실현 불가능한 계획들을 완벽으로 이끄는 만능열쇠가 되는 것이다. 아이들은 집에 갈 수 있다는 자신감 하나로 단단히 무장한다. 완전 범죄 유형의 아이들은 섣불리 결과를 도출해 내지 않는다. 미분과 적분, 기하에 이르기까지 수학적 답을 찾고 나서야 그제야 비로소 기숙 학원이라는 이름의 수용소를 떠날 채비를 한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기숙 학원이 진짜 수용소처럼 느껴진다. 이 외출 복귀 때, 어떤 아이들은 부모님의 차량 뒷좌석에 앉아 루트 하나하나를 눈과 머리에 새긴다. 부모님의 걱정이 담긴 잔소리들은 차량 뒷좌석까지 도달하지 못한다. 뒷좌석 아이의 머릿속엔 오로지 버스정류장 근처 가로등 열두 개를 지나면 작은 다리가 나오고 다리를 끼고 오른쪽으로 돌면 학원으로 가는 쪽 길이 나온다는 것뿐이다. 이보다 더 복잡한 구조의 길도 외워야하기에 앞자리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는 무의식의 흐름 속에 매몰되고 만다.
‘나올 때는 왼쪽으로 돌아야 해. 왼쪽으로 돌아 200미터 직진하면 작은 다리가 나온다. 그곳에서 가로등 불빛을 찾으면 된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 방향 감각을 익히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혹여나 오른쪽 왼쪽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면 미로 같은 산길에서 길을 잃기 때문이다. 길을 잃으면 영락없이 기숙학원으로 돌아와야 한다. 이제 완전 범죄형 아이는 혼자서는 완벽하게 탈출 할 수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에 마음이 맞는 동료를 모은다. 혹여나 그 동료들에게 비난을 받지 않으려면, 리더로써 길의 방향을 완벽하게 외우는 것은 기본 소양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아이는 뒷좌석에서 식은땀을 흘려가며 리더의 막중한 책임감을 조금이나마 진지하게 배워 나가는 중이다. 학원 학교 그 어느 곳에서도 가르쳐주지 않았던 생소한 무게감을. 길과 동료 문제가 완전히 해결됐다면 이제 식료품과 물, 버스에 탈 돈이 필요하다. 동료 중에는 풍족한 용돈을 받는 아이들이 이미 선별되었기 때문에 버스비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문제는 식료품과 물이다. 식료품은 하루하루의 배고픔을 간간이 채워 줬던 부족하디, 부족한 간식을 차곡차곡 모아 놓는 것으로 준비한다. 물은 기숙 학원 내에 있는 매점에서 구매하거나 부모님께서 공부 열심히 하라고 보내주었던 500ml 삼다수로 대체한다. 이제 준비는 완벽하다. 아이는 다음 휴가 복귀를 기점으로 식료품과 물을 자신만이 알아볼 수 있는 땅속에 묻어 둔다. 아니면 숲속에 던져 놓는다.
이 아이들의 목적은 앞서 말했던 ‘감성 편지형’의 아이들, ‘야밤 도주형’의 아이들 그리고 ‘나 잡아 봐라 형’의 아이들과는 근본부터가 다르다. 앞서 말한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편안함의 자유를 찾는 것이었다면, 이 아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순수한 자유. 그 자체이다. 이 아이들이 학원을 탈출하기 위해 뜻을 모으는 이유는 단 하나다. 떠밀리듯 들어 온 기숙 학원에서도, 가장 안정감을 느껴야 할 자신의 집에서도, 그 어느 곳에서도 자유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아이들은 더 완벽해 져야 했다.
외출 후 기숙 학원으로 돌아오는 길목에서, 음식을 땅에 묻고, 숲속에 던지는 상황에서 이 아이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자유는 소중하다. 기숙 학원에 들어와 자유를 빼앗김으로 자신이 그토록 원했던 순수한 자유를 얻을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기만 하다. 이 아이들이 학원을 벗어나면 아이들은 절대로 돌아오지 않는다. 그 어느 곳으로도 말이다. 돌아갈 곳이 없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그 공허하고 참담한 심정을 아이들은 얼마나 오랫동안 견뎌 왔던 것일까? 견딜 수 있는 시간이었을까? 나는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하겠다. 그 깊은 상처들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니 글로 표현해낼 수 있다. 내가 잠시라도 이렇게 생각했다면 나는 양심의 가책으로 밤잠을 설쳤을 것이다. 아이들이 없어진 것을 알게 되면 학원은 비상에 걸리고, 부모들은 그제야 자신들의 커리어 보다 아이가 소중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생명을 가진, 영혼을 가진 존재의 소중함을 이 세상 그 어느 것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기숙 학원은 그런 곳이다.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간절히 기다리다가도 아이가 집에 왔다는 소식을 들으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이 돌아가는 곳이다. 나는 그 감정들을 기억하고 기록할 뿐이다.
무엇이 이 아이들에게 마치 탈옥수들처럼 규율을 어기게 만드는 것일까? 나는 이곳에 있으면서 자유의 소중함에 대해 더더욱 배운다. 그리고 자유의 가치가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을 느낀다. 우리는 살아오면서 보편적 자유를 통해 자유를 느낀다. 하지만 억압과 강한 규율이 있을 때 사람들에게서 보편적인 자유는 그 이유와 가치를 잃게 된다는 것을 이곳에서 보고 배웠다.
벗어나고 싶고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되는 아이들을 탓하고 싶지는 않다. 그렇다고 기숙학원의 규율을 깨고 그 아이들에게 그들이 가지고 있는 가치 안에서의 자유를 허락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대부분 경우
란 말로 아이들의 자유 욕구를 막을 수 있게 된다. 이런 말들이 통하지 않는 자신만의 자유 의지를 가진 아이들이 탈주를 시도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기숙 학원에서 도망치는 아이들을 보면서 처음에는 그들을 분류해내는 탐정이었다. 눈빛이 달라지고, 더이상 가식적인 예의를 차리지 않는 아이들을 눈여겨본다. 그리고는 그 아이들이 학원에서 벗어나면 내 안에 있는 모든 운동 신경 세포를 깨워내 매섭게 그들 뒤를 쫓는 추노꾼이 되었다.
그다음에는 아이들에게 귀를 열고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귀를 여니 마음이 열리게 되고 아이들 각자의 이야기를 들으니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자유에 대해 고민하고 가족의 의미를 돌아보게 되었다. 규율은 지속 가능한 평화를 가져다주지만, 개개인의 자유를 깊이 들여다보지는 못한다. 나는 모든 자유를 빼앗긴 사람들에게 측은지심을 느끼는 성인군자가 되고 말았다.
글을 쓰게 만들고, 지난 과거를 돌아보게 만든다. 과거를 돌아보게 만드는 일은 그 과거가 미소가 절로 나오는 소중한 추억이든, 생각하는 것만으로 편두통이 밀려오는 씁쓸한 기억이든 무언가 아련한 통증을 수반한다. 이 아련한 통증을 줄이기 위해 나는 소망한다. 수험생활을 성공한 아이들도,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해 눈물을 쏟아냈던 아이들도, 기숙 학원에서 도망쳐 나온 뒤 소식을 전해 들을 수 없는 아이들도. 대한민국의 수험생활을 지나온 사람들이라면 지금쯤은 저마다의 자유를 찾아 평안함에 이르렀길 간절히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