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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즐거운가 Dec 15. 2024

다정함과 쌀쌀함 그 사이

행복을 추구하는 데 있어 개인주의가 가장 큰 만족을 주는 것은 아니다.

수많은 연구에 따르면 의미와 성취를 찾기 위해 적극적으로 개인의 행복을 추구할수록 더 불행해지고 더 외롭고 우울해진다고 밝혔다. 개인적 추구가 아닌 사회적 참여의 형태로 행복을 추구하는 경우에는 더 많은 행복을 얻는 결과가 나타났다.

자녀는 왜 부모를 거부하는가/ 죠슈아 콜먼. 정보경 옮김/리스컴/     





엄마도 엄마의 잔소리가 무섭다     

가끔 큰딸은 친정에 와서 그대로 눌러앉는다

(사위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기쁨이 스친다).   


그리고 이어서 다음 상황이 전개될 때가 있다.  


나는 기회를 놓칠라 구순이 가까운 친정엄마와 여동생을 부른다. 이러나저러나 가끔 뵈어야 하니 우리 집으로 모시는 거다.     


여기엔 사실 나의 계산법이 숨어있다.     


엄마가 증손녀를 보시며 즐거워하시느라 정신이 팔려서 나를 졸졸 따라다니며 잔소리하는 것을 피하기 위함이다.   


 마도 자기 엄마의 잔소리가 무섭다.ㅎㅎㅎ


몸은 두 배로 힘들지만, 효도와 딸 사랑을 한 방에 해결하는 일타쌍(一打雙皮) 전략이다.     


손녀들은 내가 엄마와 적절한 마음 거리를 유지하여 평화를 지킬 수 있도록 돕는 비무장지대의 역할을 한다. 손녀들의 재롱 덕분에 우리는 더 잘 지낼 수 있다.        






너나 잘하세요.

둘만 살자며 아담하게 지은 건평 24평의 전원주택에 24시간을 여덟 명이 함께 지내려니 그야말로 미어터진다. (다행히 다락이 있어 저녁마다 나는 나만의 공간으로 피신한다).    


두 손녀의 재롱에 일  치 웃음을 가불 해서 웃기도 하지만, 사람과 사람 간에 필요한 최소한의 독립된 공간이 위협받으나 스트레스도 받는다.     


분란이 주로 일어나는 장소는 역시 가장 인구밀도가 높은 거실과 주방이다.      


초기 며칠, 반가움의 유효기간이 소멸하고 나면 드디어 몸과 마음의 방전이 시작된다.


 나는 수시로 충전이 필요한 저질 체력의 소유자다.

    

잠깐씩 집에서 탈출해서 혼자 수영도 가고 강아지와 산책하러 가면서 멘탈을 챙긴다.     


하지만 딸과 친정엄머는 " 어딜 자꾸 나가냐?"며 서운해한다 (자신들에게만 집중해 달라는 손님들! 저도 숨 좀 돌릴게요).     


 급기야 딸과 나는 순간순간 부딪히기 시작한다.   


딸이 나에게 발끈하는 지점은 주로 손녀들에게 쓰는 육아에 적합하지 않다고 여겨지는 말과 관련된 것이다.     


나도 나름 신경 쓰는 편이지만 딸의 엄격한 기준은 못 따라간다 (이래서 절대 자식이랑 같이 살면 안 된다).     


딸이 정해둔 선을 넘는 말이 내 입에서 나오면

삐~옐로카드가 날아온다.

아슬아슬 일촉즉발!     


결국 딸 입에서 "이제 집에 갈 때가 되었어"라는 말이 나온다.

속으로 반갑다.     


그러시던지요.

우리 이만면 회포 많이 풀었죠?   


다크서클이 턱밑까지 내려왔던 딸 얼굴이 그간 엄마 밥을 꼬박꼬박 잘 먹어서 그런가? 제법 깐 달결처럼 뽀샤시하다.


부럽다. 역시 젊은이들은 회복탄력성 좋다 (딸은 다음날 올라갔다. 오해 마시라. 육아 갈등으로 삐져서 간 건 아니다. 원래 예정된 이별이다).     


딸의 투덜거림을 보며 생각한다.

나는 건강한 경계를 지킬 줄 아는 인간이 되려면 아직 한참 멀었구나.     


정말 다행이다

은퇴 후 남는 게 시간인데 이렇게 피나게 노력할 거리가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죽기 전에 제대로 된 인간이 되는 게  목표인데 가능하기는 하려나 모르겠다.     


다만 희망적인 것은 상대가 싫다는 거절 신호를 보내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일단 멈춘다는 것이다. 느리지만 시간이 갈수록 조금씩 나아지는 내가 보인다.     





역시 가끔 즐겁게 만나야

집에 가시겠다고 매일 조르시던 엄마도 일주일 만에 드디어 떠나.


아무리 맛난 것을 해드려도 엄마도 자신의 집이 제일 편하신 거다.     


반가웠고 즐거웠지만

모두 떠나니 더욱 즐겁다.


손녀 장난감으로 난장판이 된 거실을 치우고 두 팔을 한껏 벌리고 엉덩이를 흔들며 덩실덩실 춤을 춘다.      


이제부터 자유다.


역시 나이 들면 부모와 자식은 떨어져 각각 잘 살다가 가끔씩 즐겁게 만나는 게 최고다.       






적당히 까칠하고 적당히 다정한 그녀들

주변에서 "딸이 둘이라서 좋겠다"는 말을 수없이 .     


글쎄다?


내 딸들은 소위 곰살맞음과 전혀 거리가 멀다.    

 

우리는 멀리 떨어져 있지만 거의 안부 전화를 하지 않는다.


 자주 연락을 주고받는다고 더 행복한 건 아니라는 걸 서로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친구는 하루라도 멀리 살고 있는 아이들과 메신저를 안 하면 어쩔 줄 모른다. 사고로 어린 자식을 앞서 보냈던 친구에게는 가족의 안전 확인이 최고의  행복이니까  ^^).  


전화 공포증이 있었나는 신혼 시절 시댁에 정기적으로 안부 전화를 했. 할 말도 없는 어렵기만 한 시부모에게 전화를 하려면 몇 시간 전에 먹었던 밥이 체할 정도로 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래서 나는 아무리 가족이어도 숙제처럼 정해놓고 하는 전화가 싫다.     


우리는 어쩌다 가끔 만나면 다정하게 시간을 보내지만, 평소에는 다들 알아서 사느라 바쁘다.     


무엇보다 우리 딸들은 "자식이라면 당연히 00해야 한다"라는 당위성에서 출발하는 효도를 질색한다. 


효도를 강요당해 봤던 나는 의무감이죄책감에서 유발된 효도를 하는 것이 얼마나 부담스럽고 질식할듯한 느낌을 주는누구보다 잘 안다.     


나는 나와 적절한 거리를 두려는 딸들의 그런 까칠한 태도가 참 좋다.     


효도는 부모가 바래서 받는 게 아니고 자연스럽게 자식의 마음에서 샘솟듯 우러나야 하는 거다.


나 역시 그런 마음으로 효도할 때 즐겁고 행복하다. 






엄마. 아빠를 보며 희망이 생겼어

귀촌 후 어느 날 집에 온 까도녀 작은딸이 말했다.   


"엄마 아빠가 나이 들수록 점점 행복해지는 것을 보니 너무 좋아. 나도 나이 들 저렇게 살면 되겠다는 희망이 생겼어. 나이 드는 게 안심이 돼"   


부모 노릇이 처음이다 보니 돌아보면 딸들에게 미안하고 후회되는 일을 저지른 게 한둘이 아니다.


이런 나에게 딸의 말은 최고의 위로와 칭찬이다.  


은퇴 후 우리 부부의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딸이 행복을 느끼고, 나이 드는 것도 안심이 된다니 더없이 기쁘다.     


다가올 노년기지금처럼 잘 보낼 수 있다면, 나는 딸에게 돈으로도 줄 수 없는 최고의 유산을 물려줄 수 있을 것 같다.     


나도 희망이 생겼다.

 



      

오래도록 안전 기지 역할을 할 수 있기를 

어쩌다(나 역시 마찬가지다) 딸들이 전화한다.


우리는 마치 어제 본 듯 반갑게 수다를 떤다.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원점!


평소 큰딸은 카톡방에 자신들이 잘 살고 있음을 증명하듯 손녀 사진과 영상을 올린다.


막내는 가끔 내 블로그나 브런치를 염탐하며 좋아요를 누르고 가면서 내 근황을 파악.     


딸들 번호가 전화기에 뜨면 나는 의식적으로 한껏 상냥한 목소리로 환대의 마음을 착하며 전화를 받는다.


'네. 고객님 무엇을 원하시나요?'     


자식들이 각자의 삶을 열심히 살다가 지칠 때면 달려와 사춘기 소녀처럼 마음껏 퇴행하고 다시 어른의 삶으로 씩씩하게 돌아갈 수 있는 안전  역할을 부디 오래오래 할 수 있었으면 참 좋겠다.     


잘 걷고 잘 움직일 수 있는 몸을 소유한 60대라는 내 나이는 참 좋은 나이다.

그런 삶이 허락된 것은 축복이다.     


 나는 오늘도 까칠함과 다정함 그 사이에서 적정한 거리를 찾며 살아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다정하고 편안한 사람으로 나이 들고 싶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더 따뜻한 언어습관을 갖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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