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시어머니의 구순을 맞았다. 가족들과 점심을 함께하고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시누이 집에서 시간을 보냈다.
헤어지는 인사를 나누며 어머니를 살짝 안았더니 "우리 큰며느리가 최고다. 가정을 잘 지켜줘서 고맙다"라고 하시며 살짝 눈물까지 보이신다(오랜 세월을 지나는동안 집안에는 아픔들이 많았다. 오랜기간 남편의 실직이 이어졌고 이후엔 크게 아팠다. 게다가 시동생이 먼저 먼길을 떠났다. 어머니는 그 과정들을 지켜보시며 결혼당시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나를 고마워하신다).
아니! 어찌 그런 말씀을?
단언컨대 나는 어머니 말씀처럼 최고의 며느리가 아니다. 과거와 비교하면 나는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어머니의 바람들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지만 충족시켜 드리지 않는 불량 며느리다.
나이 든 사람도 변한다
흔히 나이 든 사람은 변하기 어렵다고 한다.
'사람 고쳐 쓰는거 아니다'라는 말 역시 우리가 흔히 쓰고 듣는다.사람의 본성이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어떻게 나가느냐에 따라 상대의 대응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 사람의 본성은 쉽게 변하지 않아도, 나에 대한 대응 전략은변하는 거다.
본성이 변하든 대응전략이 변하든 뭐든 상관없다.
관계만 개선될 수 있다면 나는 대만족이다.
어머니는 이제 더 이상 예전처럼 나에게 무례한 언행을 하지 않으신다.
심지어 어쩌다 전화를 드리면 그렇게 말투가 부드럽고 교양이 넘칠 수 없다. 작은 것에도 고마움을 표현하신다.
그때마다 어머니께서 처음부터 지금처럼 선을 잘 지켜주셨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라는 아쉬운 마음이 수백 번씩 든다.
그럼 내 소중한 반쪽을 낳고 길러주신 어머니를 진심으로 마음속 깊이 사랑할 수 있었을 텐데.ㅠㅠ
관계가 회복되었지만 내 마음의 상처는 명품 수선 장인의 손길이 닿은 듯 흔적 없이 말끔하게 사라지지는 않는다.
피를 나눈 사람과는 가능할 수있을지 모르지만, 유전자를 공유하지 못한 시어머니와는 아직 그게 안 된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이 정도도 만족스럽고 감사하다.
늦었지만 참다행이다
나는 오랜 기간 어머니를 죽을 만큼 미워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어머니가 밉지 않다.
선을 넘지 않으시니 어머니를 만나도 화나 분노가 일지 않는다. 오히려 하루하루 노쇠한 어머니 모습에서 내 미래의 모습을 보며 안타까워할뿐이다.
어머니를 만나는 순간이면 좀 더 잘해드리려 마음 쓰는 내 모습을 발견한다.
우리 사이에 다시는 올 수 없을 것 같았던 시간이 찾아온 것이 기쁘고 감사하다.
분노와 불평 대신 불편을 연습했다.
화와 분노를 꾹꾹 참아가며 계속해야 했던 소위 며느리의 도리라 불리는 것들을 잘라내는 데에는 용기와 긴 견딤의시간이 필요했다.
나조차 나를 변화시키기가 이렇게 어려운데, 남에 의해서 내가 변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내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전과는 아주 다른 사람이 돼버렸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실 때까지 어머니가 긴긴시간 느꼈을 서운함과 힘듦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나이 들어 변하시려니 더 힘드셨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 힘든 걸 시어머니가 해내셨다.
늦었지만 참 다행이다.
진심으로 어머니가 건강하게 오래오래 즐겁게 사셨으면 좋겠다.
분노와 불평 대신 불편을 연습하고 실천한 결과다.
나는 효도가 싫다
죄책감은 사람을 짐승과 다른,사람답게 만들어주는 중요한 순기능을 가지고 있다.
반면에상대를 내 생각대로 끌고가기 위한 기술로 자주 악용됐다.
그만큼 효과적이라는 뜻이다.
특히 부모,형제 등 가까운 사람들이 자주 쓴다.
자식이 효도하려하나 부모는 기다려 주지 않는다.
내가앞으로 살면 얼마나 산다고,
부모 살아계실때 효도해라. 후회하지 말고....
그냥 서로사랑하자고하면될걸
참 자식들 마음 불편하게도 말한다.
나는 효도가 싫다.
정확하게 말하면 은근히 효도를 강요하는우리 문화가불편하다.
공부하려고 막 책을 펼쳤는데, 부모가 공부하라고 잔소리하면 탁하고 책을 덮어버리고 싶은 심정?
딱 그런 마음이다.
고단한 세상을 살아내다보면 부모의 노고가 가슴 시리게와닿는 순간이 있다.
강요하지 않아도 알아서 마음이 간다.
막말로 몰라줘도 할 수 없다.
자식이 낳아달라고 동의한적도 없는데?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세상을 만나다
부모, 자식이라는 이유로 부모의 무례가 무조건 용서되던좋은 세상은 다 물건너갔다.
게다가 100세시대다.
효도를 강요하는건 서민들의 평균수명이 35세라던 조선시대에나 통하는 말이다
우리는 어쩌면 70년이상 얼굴을 보며 살아야할지도 모른다.
세상에나!
우리는 그간 인류가 한번도 체험하지 못했던 후들후들한장수 시대를 만났다.
이젠 어느 순간부터 자식과 함께늙어가게 생겼다.
게다가 오는 순서는 있어도 가는 순서는 아무도 모른다.
서로 사이좋게 그 긴 세월을 살다가려면 아무리 가까운 부모와 자식(며느리,사위)사이라도 건강한 거리두기는 필수다.그래야 서로 미워하는일 없이 웃는 낯으로 더 오래오래 사랑할 수 있다.
지킬수록 좋아지는 경계의 역설
끈끈한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는 우리의 집단 문화 속에서 주변 사람, 특히 가족 등 가까운 사람들에게 선을 지켜 달라는 말 참 쉽지않다.
자칫 나를 싫어하게 되거나 서먹한 관계가 될까봐 두려움도 느낀다.
상대는 나를 차갑고 심지어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여길수도 있다.
그러나 나의 자율과 독립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은 타인의 자율과 독립 역시 중요하게 여긴다.
남이야 어떻든 내 이익만 챙기는 이기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다.
무엇보다 서로 경계를 지키면 갈등이나 다툼을 피할 수 있다.
더 오래 좋은 사이가 유지된다.
불안함이나 불쾌함 대신 안전하다는 느낌을 느낄 것이고, 오히려 점점 사이가 좋아질 확률이 높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