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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즐거운가 Nov 17. 2024

뒤끝 있는 여자의  마음을 푼 남편의 한마디

건강한 경계가 건강한 관계를 만든다

나는 뒤끝 있는 여자다.

그것도 아주 길~다.

임신했을 때의 서운함은 평생 간다.

내가 함부로 여겨지는 것까지는 어찌어찌 견뎌도 내 자식까지 함부로 취급받는 것은 못 견딘다.


그건 엄마들이 본능으로 긋는 선이다.

이 선을 넘는 사람의 언행은 가슴에 비수처럼 날아와 콕콕 박힌다.



사골 국물처럼 우려먹는 상처

시댁과 서운한 일이 생길 때마다 나는 둘째를 임신한 당시 시댁에서 겪었던 서러운 기억을 나도 모르게 자극당한다.(당한다는 표현이 맞다. 이 사람들은 여전히 변한 게 없다는 실망감일 거다).


스물아홉 살 때의 일을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하는 천재적인 기억력에 나 자신도 흠칫 놀랄 지경이다. 처음에는 꼬리를 내렸던 남편도 나중엔 지쳐서 '언제까지 화를 낼 거냐?'라고 짜증을 냈다.


신!

기승전결 시집이야? 지친다.




그런데 이런 현상!

우리 집 있는 게 아니다.


대한민국의 수많은 남편과 아내들이  비슷한 일로 다툰다.

심지어 아내들은 공소시효라는 개념조차 모르는 것 같다.


대체 그녀들은 임신했을 때의 서운함이나 시집살이의 상처를 왜 평생 사골 국물처럼 우려먹 것일까?


남편들은 남편대로 미칠 지경이다.

그야말로 징글징글하다.

결혼생활에 회의가 몰려온다 (아내도 남편의 그런 심정을 이미 다 알고있다).


대한민국 남자들은 여자들의 이런 모습에 다들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진정 이 난제를 해결할 방도는 없는 걸까?





그만 잊으라는 말 부로 하 마.

그 날,

버럭 하는 남편에게 내가 답했다.


그 기억?

누가 제일 잊고 싶을까?

지우개가 있으면 나도 빡빡 문질러서 싹~ 지우고 싶어. 기억에서 가위로 오려내고 싶다고....

그런데 어떻게 해?

그게 안 되는 걸.


그런데 말이야.

제 내게 진심 어린 사과라도 한번 해 보고 하는 말이야?


제발 상처 입은 사람에게

뒤끝 없어. 그때뿐이야.

그걸 아직 꽁하게 가슴에 담고 있냐?

이제 그만 좀 잊어라는 말 함부로 하지 말자.


용서는 잘못한 사람이 빌어야 하는 거지 용서받아야 할 사람들이 당당하게 요구하는 게 아니다.


용서에 대한 결정권을 가진 사람은 피해자다.





시간이 흐르면 아픔이 힌는 말은 거짓말이다. 

몇십 년 결혼 생활을 하다 보면 '내게도 이런 소설 같은 일이 벌어지네' 싶을 만큼 예상치 못한 큰 어려움을 겪을 때가 있다.


그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 시간을 떠올렸다.


'너. 그 시간도 견딘 여자야. 이쯤이야...'라고 생각하면 묘하게도 견딜힘이 솟아났다.

그만큼 그 시간이 내 인생에서 힘들었다는 뜻이다.


유쾌하지 않지만, 결혼 초에 인생의 아주 쓴 맛을 경험하며 굳은살이 박힌 덕분에 웬만한 일에는 꿈쩍도 안 하는 내공도 생겼다.


하지만 부작용으로 나는 우는 법을 잃었다.

임신 중 눈물을 다 써버린 걸까?

살다가 속상하고 힘든 일이 생기면 가끔 혼자 엉엉 울기라도 하고 싶은 날에도 울 수가 없었다.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울 수 있는 원래의 나로 다시 돌아올 때까지 아주아주 여러 해가 걸렸다.


그 시절 나는 이 집안의 충실한 맏며느리 역할을 하기 위한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듯한 느낌을 받으며 살았다. 내 삶에서 내가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그 상황을 겪은 후 나는 깨달았다.

사람은 몸이 힘든 것은 견딜 수 있어도 자신이 소멸는 삶은 견딜 수 없다는 사실을....

그래서 나는 그토록 마음이 아팠던 거다.





내가 가장 고 싶은

 미안했다는 시어머니의 진심 어린 사과다.

그러나 자신 몸 하나도 힘들어서 감당이 안 된다는 노인에게 달려가 과거사를 따질 수도 없다.


그러니 나는 가끔 당시 사건 현장을 방관하고 때로는 동조하기까지 한 그분의 아들을 족친다.


내 마음은 소리친다.

결국 당신도 공범이잖아!


 


내 마음을 푼 남편의 말 한마디

뒤끝 있는 이 여자!

기회가 닿을 때마다 지치지도 않고 화를 냈다.

그랬던 내가 마음을 풀 된 것은 어느 날 남편 이 마디 때문이다.


"그땐 내가 너무 뭘 몰라서 당신 편이 돼주지 못했어. 대체 왜 그랬을까? 내가 미쳤었나 봐.

미안하다. 대신 앞으로 을 때까지 당신에게 잘하며 살게." 


순간 얼었던 마음이 스르르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날 남편은 미안하다는 사과와 함께, 죽을 때까지 내게 잘하겠다는 피해 보상 겸 재발 방지책 내놓던 것이다.


피해자들이 계속 화를 내는 이유는 딱 하나다.

가슴에 와닿는 진심 어린 사과와 피해 보상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떤 식이든 피해 보상은 이루어져야 한다.

물질이든 남편처럼 마음과 몸으로 대신하든....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면피용 영혼 없는 '미안해'라는 말이나 '그때 나도 힘들었어' 따위의 말은 화만 돋울 뿐이다.


나는 그날, 진심 어린 사과와 함께  피해 보상과 재발 방지책에 대한 약속, 그리고 그 약속이 성실게 이행되는 과정을 해서 '이 사람이 정말 미안해하고 있음'이 상대의 마음에 가닿게 된다는 사실을 슴으로 알게 되었다.


남편은 대한민국의 수많은 남편들이 풀지 못한 난제를 결국 해결한 대단한 사람이다.


나는 그날 남편의 한마디에 정말 큰 위로를 받았다.





이따금 비난 병은 재발다.

워낙 크게 마음을 다친 터라 내 의지와 상관없이 마음의 상처는 쉽게 덧난다.


그러나 남편은 확실한 대처법을 터득했다.

영리한 이 사람은 그때마다 셀프 디스를 한다.


"그러게 그땐 내가 너무했어.

미쳤었나 봐.

혼자 얼마나 힘들었겠어!"


심지어 나보다 좀 더 오버해서 속상한 척한다. 상처에 연고를 발라주는 공감의 말 한마디 나는 바로 진정된다.


은퇴하고 귀촌 후 단 둘이 살면서 남편은 츤데레 할배가되었다. 정말 나에게 잘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마음으로 느껴진다. 그는 자신이 약속한 재발 방지책을 성실하게 이행하는 사람이다. 그 마음씀이 고맙다.


이제 내 병은 거의 치유되었다.

나는 더 이상 그 일로 남편을 족치지 않는다.



* 마음속 불을 진화해 준 용서에 대한 글

용서하기(forgiving)는 무엇인가를 '앞으로 주는 것(giving forward)'이다. 뒤돌아보아 과거에 집착하거나 얽매이기보다는 앞을 내다보고 미래를 향해 나가면서 다 내어주는 것이 용서다.

뒤돌아보아 앙갚음하고 빼앗는 것이 복수라면, 앞을 보고 내어주는 것이 용서다.


용서의 핵심은 그저 "다 괜찮아"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과거의 일에 대해 다시 의미를 부여하고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항상 지금 여기에 나 자신을 던져 넣는 것이 용서다. 증오나 복수심은 반대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과거 일에 매달리고 나 자신을 던져 넣는 것이다. 삶의 지평을 멀리 내다보고 나를 얽매는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자유롭게 지금 여기에 존재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용서다.


분노를 지닌 채 살아가는 삶은 괴롭다. 많은 사람이 스스로 지닌 증오심과 복수심 때문에 괴로워한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증오하는 것은 내가 나를 아프게 하고 병들고 늙게 한다. 분노를 지니고 사는 것은 불을 가슴속에 품고 사는 것과 마찬가지다. 분노는 내 속을 태운다. 괴롭다.


분노를 품고 살아가는 것은 잘못은 상대방이 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나를 지속적으로 벌을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출처: 내면 소통/김주환/인플루엔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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