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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즐거운가 Nov 24. 2024

미움받을 용기를 내다.

지킬수록 가까워지는 경계의 역설

* 어느 한쪽이 참거나 기를 쓰고 노력해서 유지되는 관계는 건강한 관계가 아니다. 절대 평생 못 간다.


* 말하지 않아도 남들이 마음을 알아줄 거라는 기대는 건강하지 못한 관계로 가는 지름길이다.


내가 좋아하는 정신과 의사 김혜남 님의 극공감이 가는 문장이다.



 


내가 이토록 사람을 미워하는 사람이 되다니....

솔직히 말하면 다시는 시어머니를 보고 싶지 않았다. 너무 싫고 미웠다.

속된 말로 시금치의 시자도 싫어하는 사람이 돼버린 거다.

그러나 더 싫고 절망스러운 것은 내가 사람을 미워하는 사람이 돼버렸다는 실이다.


사람들은 '저 사람은 절대 변할 수 없다'는 생각, '관계 개선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생각이 들 때 손절을 선택한다. 관계 회복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넌더리가 난 나는 마음 같아서는 딱 그러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리 내가 악마의 편집을 해도 어린이집도 없던 그 시절, 어머니는 큰 딸을 내가 직장에 간 동안 3년이 넘게 돌봐주셨다. 아무리 순둥이였어도 얼마나 힘드셨을지 설명이 필요 없다.


미운 건 미운 거고 감사한 건 감사한 거다.

내가 어머니를 아주 외면하지 못하는 이유다.


그렇다고 해서 어머니가 내게 주신 상처마저 사라지지는 않는다.


결국 나는 요즘 말로 손절 대신 거리두기를 택했다. 어머니로부터 멀어지기로 했다.





미움을 품고 살 수는 없어

내가 달라져야겠다 마음먹은 장 큰 이유는 두 딸 때문이다.


부당한 일에 거절을 못 하는 억울함과 분함을 뒷담화로 풀고 불평과 화를 품고 사는 못난 엄마의 뒷모습을 보며 딸이 배울까 봐 겁났다.


무엇보다 어릴 때부터 사람을 미워하면서 인생을 배우는 것은 너무 슬픈 일이다.


"엄마처럼 살 거야"라는 말은 못 들을망정 "엄마처럼 살지는 않을 거야"라는 말을 들을 수는 없지 않은가?


나는 다음 세대에게 내가 겪은 상처를 유산으로 물려주는 엄마만은 되고 싶지 않다.


내 모든 상처는 내 대에서 끊어내고 싶다.

내 자손들이 세대를 거듭할수록 더 좋은 쪽으로 발전하길 바란다.





싫든 좋든 딸의 핏속에는 시어머니의 피가 흐른다.

내게는 미운 시어머니일지라도 아이들에게는 사랑하는 할머니다. 자칫 내 영향으로 딸이 자신의 핏줄을 미워하는 우를 범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시어머니와 나의 관계와 딸들의 할머니와의 관계는 별개의 문제다.


그것은 살면서 딸이 알아서 결정할 일이다.

나는 내 감정과 별개로 아이들이 조부모를 사랑하길 바다.





절반의 책임은 나에게 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결국 이 상황을 만든 책임의 절반은 나에게 있다.


억울하고 인정하기 싫지만 나에겐 '나 자신을 보호하지 못한 책임'이 있다.

나는 어린아이가 아닌 성인이니까....


나는 시부모와 잘 지내고 싶었고 사랑받는 며느리가 되고 싶었다. 자라면서 주변 어른들에게 늘 들어왔던 것처럼 잘한다는 소리를 시댁에서도 듣고 싶었다. 열심히 하면 그런 내 마음을 알아줄 거라고 기대하며 친정 부모에게도 하지 않았던 것들을 했다.


한마디로 혼자 잘해주고 상처받은 거다.


게다가  보이려는 내 욕심은 점점 나를 눈치 보고, 부당한 일에도 항의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평가에 연연하며 눈치를 보다가 결국 삶의 통제권을 잃고 휘둘리며 살게 된 것이다.


어머니 기대대로 하자면 거의 내 인생을 며느리 노릇에 헌납하며 살아야 한다. 그럴 수는 없다.


처음부터 그 길을 들어서지 않는데, 이제 빠져나가려 애쓰는데 더 큰 힘을 들여야 하는 상황을  스스로 만든 이다.





미움받을 용기

나는 제일 먼저 사랑 받기를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자 놀라운 변화가 찾아왔다.

신기할 만큼 마음이 편졌다.

 

그간 나는 최선을 다한다는 말을 좌우명처럼 늘 가슴에 품고 살았다. 그러나 적어도 인간관계에서만큼은 나 혼자서만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부터는 최선을 다하지 않을 거니까 못한다는 말을 들어도 서운할 일이 없고, 뒷담화를 들어도 억울하지 않다는 마음이 들었다.


나는 시부모님과 함께 걷는 꽃길을 상상하며 결혼했다. 그러나 그것은 내 바람이었을 뿐 어머니와 나 사이는 자주 비바람이 불고 심지어 천둥번개가 내리쳤다.


제 그만 이 상황을 종결시키고 비바람에서 벗어나 맑은 날을 맞이하고 싶다.




뒤이어 남편에게 선전 포고를 했다.

앞으로 시어머니에게 더 이상 끌려다니지 않겠다. 이래도 저래도 부족하다고 책을 잡히니 이제부터 어머니의 요구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수용하겠다.


대신 전처럼 원망하거나 미움을 품지 않겠다.

기꺼이 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일들은 좋은 마음으로 웃으면서 하도록 노력할 거다.


 일이 있더라도 삶의 주도권을 되찾겠다는 결연한 내 의지를 직감한 걸까?

아니면 내 생각에 남편도 공감한 걸까?

 그건 모르겠다.


내 선전포고에 그토록 순종적인 며느리의 삶을 강요하던 이 남자가 달라졌다(다들 신혼 때 많이 싸우지만 나는 아이 둘이 훌쩍 자라도록 남편에게 제대로 게 나가본 적이 없다).


하지만 남편은 내가 굳게 마음먹으면 뒤돌아보지 않는 무서운 성격임을 잘 안다.





나는 렇게 나만의 기준을 세웠다.

그리고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그 기준을 떠올리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너 지금 하는 이 행동(노력)을 평생 좋은 마음으로 계속할 수 있겠어?


힘들거나 억울한 마음 품지 않고 기꺼이 할 수 있냐는 뜻이다. '그렇다'라고 자신 있게 답할 수 없는 지속 가능하지 않은 일들은 아무리 마음이 힘들어도 이제부터 안  거다.




어머니!

이제 다시 시작입니다.

분가 이후 나는 때로는 소심하게 때로는 대범하게 화를 시도하기 시했다. 


그간 어머니의 뜻에 맞추던 많은 행동들을 의도적으로 그만둔 것이다.


효라는 이름으로 결혼할 때부터 계속해 왔던, 직장을 다니는 내가 해내기에 아주 버거웠지만 어머니에게는 당연했고 더 자주 하기를 바라셨던 일들이다.


이제 나도 늘 어머니께서 한없이 너그러운 눈빛으로 "둘이 잘 사는 만으로도 효도"라고 누누 말씀하셨던 다른 형제들처럼 살아 볼 거다.


남편은 운 나쁘게 겨우 몇 년 먼저 태어났다는 이유로 장남으로 당첨되었다.


자신이 원하거나 동의하지 않았음에도 부모와 형제들은 당연한 듯 '다른 형제와 다른 삶의 잣대'를 들이대며 다르게 살라고 요구한다.


이제 장남(맏며느리) 콤플렉스 따위는 내가 먼저 벗어던져 버릴 거다.


며느리도 여자도 아닌 ,그냥 사람으로, 살기로 한다.




관성의 법칙을 거스르기란 아주 힘들다.

그동안 하던 것들을 그만두자, 예상대로 여기저기서 비난의 목소리가 몰려왔다.


마음이 정말 불편했고 때로는 죄책감 때문에 힘들었다.


몸이 힘들어도 차라리 예전처럼 하는 게 더 마음 편하겠다는 생각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견뎌야 한다.


딸을 위해서라도 나는 꼭 변하고 말 거다.

나는 엄마니까.





어머니와 나의 불협화음은 점점 더 커졌다.

어머니가 냉랭하게 대하셔도 계획대로 나갔다.


어머니는 가끔 전화로 화를 폭발하셨고, 결국 나는 어머니께 '우리는 도리로 맺어진 사이이니 제가 어머니를 대하듯 어머니도 제게 예의를 지켜달라'고 대놓고 말씀드리기에 이르렀다(이후 그런 전화는 다시 안 하셨다. 그날 발칙한 며느리의 말에 큰 충격을 받으셨을 거다).


나는 어머니가 무엇을 원하시는지 알지만 일부러 무반응으로 나갔다.


대신 하겠다고 마음먹은 일은 웃으며 하려고 노력했다.


난 피부가 얇은 편이다.

내 얼굴이 그렇게 두꺼워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그렇게 어머니와 나 사이에는 길고 긴 힘든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느리지만 서서히 우리 사이는 드럽게 변화하고 있었다.





그건 가스라이팅이었어

제사랑 제가 난다.

(사랑받을 짓을 해야 사랑받지 라는 뜻이다)


나하나 참으면 모두가 편하다.

(그게 왜 하필이면 저죠?)


열심히 하면 언젠가 알아주는 날이 온다.


 시절 어머니께서 내게 계속하셨던 말이다.


나는 그 말을 벗어 던졌다.

요즘 말로 그건 가스라이팅이었던 거다.




어머니!

저도 이제 잘 웃는 사람이죠?

화와 분노를 품고 계속할 수밖에 없던 많은 것들을 잘라내자, 어머니와 시누이를 대하는 내 표정은 전보다 훨씬 밝아졌고 말투도 싹싹해졌다.


불평하고 원망할 일은 아예 시작하지 않으니 이 나이에 심지어 애교스럽기까지 하다.


이전의 나는 시댁의 온갖 행사를 온몸으로 혼자 감당하다가 에너지가 소진되어 탈진하곤 했다

당연히 웃을 수 없었고 얼굴은 어두웠다.

어머니는 내가 웃는 낯을 안 해서 가족들을 불편하게 만든다고 늘 타박하셨다.


며느리에서 다시 사람으로 돌아온 나는 이제 ,  어머니가 그토록 원하셨던 아주 잘 웃는 며느리가 되었다.


사실 원래 나는 아주아주 잘 웃는 사람이었다.

남편은 활짝 웃는 내 모습에 반해서 결혼했고 결혼 당시 어머니도 그런 내 모습을 좋아하셨다.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내 상식으로 도저히 이해가 불가능했던 많은 상황을 세상 사람들이 '가부장제'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알았다.


이름이야 뭔들?

간고등어처럼 가부장제에 잘 절여져서 성장한 나는 그 매운맛을 실컷 체험한 후 탈출에 성공했다.


결혼 초기 어머니가 서운해하셔도 애초에 내가 할 수 있는 부분과 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해 분명하게 경계를 지었 했다. 그랬더라면 서로 크게 상처받고 사이가 악화는 것만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모든 사람과 사람 사이는 넘어서는 안되는 경계가 있다는 것을, 알지도 배우지도 못한 체 그렇게 어른이 되었다.


좋은 관계는 서로 노력하며 함께 만들어 가는 거다. 서로 선을 지키면서.....


이제 나는 힘에 벅찬 한도 초과의 효도를 하고 나서 뒤에서 불평하는 불효를 이제 더 이상 저지르지 않는다.




<당신의 경계는 건강한가요?>

나는 나쁜 대접을 받아도 항의하지 못한다

1. 그렇다

2. 그렇지 않다. 그럴 경우 나는 관계를 끊거나 욕을 퍼붓거나 뒤에서 험담한다.

3. 그렇지 않다. 나는 내가 느끼는 감정들을 사람들에게 말로 표현할 수 있다.     



1. 허술한 바운더리

2. 경직된 바운더리

3. 건강한바운더리


(출처: 나는 내가 먼저입니다/매일경제신문사/네드라 글로버 다와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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