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연하당 Nov 15. 2021

북촌지구단위계획


불과 십 년 사이 어느새 다섯 번째 집에 살고 있다.


우리가 살면서 겪는 스트레스들을 줄 세워 놓은 유명한 표가 하나 있는데(홈즈(Thomas Holmes)와 라에(Richard Rahe)의 스트레스 척도), 그 표에 따르면 이사는 그다지 심한 스트레스 요인이 아니란다. 아마 토마스와 리처드는 십 년 동안 다섯 번씩 이사 다녀본 적이 없는 듯. 이사를 하게 되면 쓰레기는 언제 내다 버려야 하는지부터, 밥 하기 싫을 때 나가 먹을 수 있는 맛있는 식당은 어디인지 까지 눈뜨고 일어나 다시 잠자리에 들 때까지의 그야말로 모든 것이 변하는데 어떻게 이게 큰 스트레스 요인이 아닐 수 있을까.


지금까지야 전셋집이었기에, 동네가 마음에 차지 않고, 집이 싫어지면 그리고 거기에서 오는 마음의 불편이 이사라는 거사를 감당할 만큼의 임계점을 넘어서면(또는 가끔은 집주인이 나가라고 하면) 미련 없이 떠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첫 집이라 그런지, 한옥이라 그런지는 모르겠어도 이번 이사만큼은 마음가짐이 좀 다르다. 인생사 어찌 풀릴지 모르는 거라고는 해도 일단은 북촌에 뼈를 묻을 각오로 준비하고 있는 것. 그 일환으로 동네에 대한 탐구를 하던 와중 알게 된 것이 "북촌지구단위계획"이다.


북촌지구단위계획은 동네 전체를 지나는 길에 따라, 또 위치에 따라 여러 개의 구역으로 나누고, 각 구역별로 규제의 수준을 정해준다. 그중에서도 1구역과 2구역은 가장 엄격한 규제가 적용되는 곳인데, 이 구역에는 한옥이 아닌 건물은 새로 짓는 것조차 어렵다. 한옥이라고 해도 벽체나 지붕 꼭대기까지의 높이가 각 4미터와 6미터로 엄격하게 제한되어 살면서 옆집 때문에 우리 집에 햇빛이 적게 드는 일 같은 건 일어나기 어렵고, 개업할 수 있는 업종 역시 극히 제한되어 익선동 식의 개발로부터도 어느 정도 자유롭다.


저마다 원하는 게 다르기에 이러한 규제가 비합리적이고, 부당하다 느끼는 사람도 분명 많을 것이다. 실제로 그런 목소리가 더 컸던 그 잠시 동안, 북촌에서 수많은 한옥이 속절없이 헐려나가기도 했으니. 하지만 적어도 내게 있어 이런 규제는 마치 이곳에 살 곳을 마련하라는 일종의 계시나, 집을 마련하기만 하면 앞으로 지켜주겠다는 약속처럼 느껴진다.


무려 서른한 가지의 맛을 선보인다고 하는(한 번도 세어본 적은 없지만) 아이스크림 가게가 어느 날부터 잘 팔리는 두어 가지 맛만 팔겠노라고 선언하면 어떨까? 그 가게에 들릴 때마다 주야장천 민트 초코만 사 먹는 나 같은  사람이야 별 문제가 없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그곳이 분명 지금보다 재미없는 가게가 되어버릴 거라는 건 확실하다(고백하건대 나도 다른 맛을 먹어본 적이 있기는 하다. 매번 후회했지만).


집에도 비슷한 구석이 있다. 아파트가 좋다고 산에도 들에도, 그리고 강변에도 바닷가에도 죄다 그거만 지어대면 정말 더 현대적이고 쾌적한 도시가 될까? 오히려 다양성을 지켜가며 서로의 특성과 장점을 극대화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더 재미있지 않을까? 그런 이유로 다소 강제적인 측면이 있다고는 해도 나는 이 도시의 다양성을 지켜나가는데 한몫 크게 기여하고 있는 북촌지구단위계획에 환호한다. 그렇게 어린 시절의 동네를 잃어버린 내 마음은 오늘도 1구역과 2구역으로 기운다.


지혜원(2020), Rolleicord IV/Kodak Portra 400


이전 04화 북촌(北村)으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