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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하당 Nov 13. 2021

북촌(北村)으로

“동네" 하면 내게 떠오르는 인상은 어린 시절을 보냈던 인천 율목동(栗木洞)의 한옥 마을이다. 동네 어귀에 가만히 놓여있던 물 펌프와(작동하는 걸 본 적은 없지만) 키가 훌쩍 큰 나무, 언덕을 따라 오르다 보면 만나게 되는 동네 사람들, 그리고 열린 대문으로 살짝살짝 들여다보이던 이웃집의 마당. 그랬던 우리 동네에 90년대가 시작되면서부터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언젠가부터 한옥집들이 높은 건물로 바뀌어 갔던 것. 한 집이 허물어지고 두 집이 허물어질 때까지만 해도 별 생각이 없었건만, 차즘 더 빠른 속도로 좁아져만 가던 동네 골목의 하늘은 내게 조용히 상처를 남겼다. 이제 그 동네는 단 한 집을 제외하고는 모두 다층 건물로 대체되었고, 내가 살던 집은 심지어 동네 공원이 되어버렸는데, 이쯤 되니 상처를 넘어 누군가 내 유년기의 기억을 우악스럽게 뜯어 내다 버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이사 갈 동네는 변화가 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도 그 때문이다. 다층 건물 구역에도, 식당가 중간에도, 서초동 같이 새로 만들어진 동네에도 의외로 여기저기 한옥이 남아있지만, 그런 동네는 내가 찾는 곳은 아니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한옥'이라는 건물 종류보다 더 중요한 건 '한옥보전구역'이 아니었을까.


북촌, 서촌(경복궁 서측), 성북, 은평, 돈화문로, 인사동, 익선동 등에 한옥이 여전히 많이 모여있는데, 은평한옥마을은 신(新) 한옥 전용 주거 단지로 2층 집이라던가 내 기준에서는 다소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혼합형 건물이 많아 원하는 모습과는 조금 거리가 있었고, 나머지 동네에서 상업지구로 분류할만한 곳을 제하고 나면 남는 건 북촌, 서촌, 성북뿐이다.


성북은 으리으리한 집이 모여있는 곳을 빼면 난개발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곳이지만, 묘하게도 막상 걸어보면 굉장히 아늑한 느낌이다. 낙산 줄기로 동네가 포근하게 감싸져 있는 채 남으로 서로 해가 잘 들어서 그런 걸까? 대학로의 활기나 풍부한 문화공간도 매력적이지만 큰 병원도 지척에 있고, 한양도성구간 중 낙산 구간과 백악 구간의 시작점이며, 북으로는 정릉이, 남으로는 궁궐이 위치하니 이만한 동네 또 없다. 한옥이 모여있는 곳이 드물어 좋은 매물을 찾기게 어렵다는 것과, 대중교통이 불편한 편이라는 것은 아쉬움으로 남았다.


예전부터 재능 있는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고 하는 경복궁 서측. 동네 전체에 “힙하고 핫한” 장소가 넘쳐나고, 그래서 외지인들의 발걸음도 끊이지 않는 곳이다. 아마 세 곳 중에서는 가장 왁자지껄한 동네. 그리고 규제가 없던 시절 굉장히 많은 한옥이 다층 건물로 대체되어버린 곳이기도 하다. 서쪽 인왕산 밑을 제외하면 지형은 대체로 평탄하며 녹지공간도 더할 나위 없이 풍부하고 심지어 시장도 있어 살기 좋은 동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촌이 개인적으로 별로 끌리지 않는 이유는 그놈의 다층 건물 때문에 어두운 곳이 많아 이상할 정도로 춥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어쩌면 서쪽을 든든하게 받쳐주고 있는 인왕산의 산 그림자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더하여 업종 제한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워서 그런지 필지의 가격도 상당히 높은 편이다. 물론 나의 개인적인 취향과는 별개로 서촌처럼 재미있고 풍족한 동네도 드물다. 아마도 사시사철 활기차고, 언제까지고 새로울 동네인 서촌. 물건이건 집이건 가격이 비싼 데에는 보통 나름의 합당한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드디어 대망의 북촌. 나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종종 물어보는 질문이 있다- “어? 경복궁 동쪽인데 왜 동촌이 아니라 북촌이야?”. 지명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설명이 있겠지만, 대체로 서울의 북쪽에 위치해서이거나 청계천 북쪽을 의미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북촌은 앞선 두 동네에 결코 뒤지지 않을 매력을 지니고 있는데, 세 동네 중 서울도시한옥이 가장 많이 남아있다는 게 첫 번째이겠다. 그 외에도 북촌은 북으로는 삼청공원, 서와 동으로는 고궁, 그리고 품 안에는 정독도서관과 수많은 미술관을 가지고 있어 심심할 일이 없는 동네이고, 재건축이나 개발은 북촌지구단위계획에 따라 엄격하게 제한되기 때문에 오래도록 동네를 지키고 싶은 사람에게는 잘 맞는다. 게다가 삼청동에서는 인왕과 백악이, 가회동에서는 남산이 눈에 가득 차니 정말 매력적이지 않은가? 애매하게 넓은 골목길에 불법주차 차량이 만연하다는 점, 전선 지중화나 도로 정비가 미진한 구역이 많고, 북으로 향할수록 고도가 높아져 집에 갈 때마다 가벼운 등산을 해야 한다는 점 등은 아쉬움으로 남을 수 있겠지만.  


고민은 많이 했지만 서촌은 비싸서 어차피 매매가 불가능했고, 성북은 동네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한 상태였기에 결정은 의외로 금방 났다. 그렇기는 해도 낯설기는 매한가지인 북촌이기에 이곳을 어떤 날부터의 나의 동네로 고른 게 잘한 일일지는 모르겠다. 부디 그렇기를 막연히 바랄 뿐.


제주(2019), Pentax MX/Fuji Superia 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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