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여섯 살 때쯤 외할머니댁 산성 동네의 집이 있었다. 시골동네의 여름도 길고 겨울은 추웠다.
시골 버스정류장 느티나무에 내리면 산꼭대기에 있는 외할머니댁에 걸어서 30분을 족히 가야 한다. 초승달이 뜬 칠흑같이 어둠에 둘러싸여 옆에 걸어가는 사람의 형체조차 보이지 않았던 그곳...
발목까지 물이 참방대는 개울을 건너고 한참 만에야 드러나는 불빛은 그 시절 나의 기억 속에 불빛처럼 남아있는 또 다른 나의 집이다.
시골의 밤은 항상 길다. 일찍 잠자리에 든다.
그리고 어느새 아침이면 어디선가 '음메' 하고 누렁이가 게으름에 겨운 소리를 낼 때쯤 외삼촌은 건넷방과 사랑방 사이에 큰 가마솥이 놓인 정지로 들어가서 그 가마솥 안에 볏짚을 넣고 소여물 ' 휘이휘이' 젓어서 끓인다.
여물이 익어 갈 때쯤 나는 특유의 냄새는 내가 외할머니집에 왔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외할머니는 부엌의 여닫이문을 열고 나가서 언제나 그랬듯 내가 좋아하는 뭇국을 끊이기 시작한다. 뭇국이 익어갈 때쯤 방 안으로 퍼지는 그 냄새에 더 잠을 자고 싶어도 일어나게 된다.
이따금 한낮에 소나기가 내릴 때면 툇마루 끝에 안에 처마 밑으로 떨어지는 비를 손바닥을 내밀어 맞아보기도 하고, 빗방울이 떨어지며 땅끝을 둥그렇게 하며 흙이 움푹 패이는 모습을 보면 하루가 지나갔다.
그럴 때면 부엌에서는 외할머니가 3년간 푹 익힌 짠지를 꺼내 칼로 '숭던 숭던' 썰어서 김치전을 부친다. 그러면 외가댁 사촌들은 안방에서 보고 있던 TV를 벤치를 들어 돌려서 끈 뒤, 여닫이 문을 '쾅' 닫고 우르르 몰려나왔다.
가족들이 마루에 앉아 빗소리를 들으며 김치전을 먹는다. 외할아버지는 창고에 들어가 사 홉들이 소주를 꺼내와 은색 밥그릇에 소주 1/4 가량을 붓고는 시원하게 한 번에 드신다.
그때의 기억은 아직도 내가 눈을 감고 생각하면 그림처럼 그려지는 풍경 중의 하나이다.
그래서 집을 고를 때에도 그 집만큼이나 집 주변의 풍경도 생각하기에 집을 사기 전에 집 주변을 들러보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여러 집들에서 살아보며 나를 만드는 장소와 주변 풍경, 사람들인 걸 알았다. 그래서 아이들과 함께 살집을 고르며 고심했고 최종 선택한 곳이 이곳 내가 살고 있는 지금의 빌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