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편안하게 누웠다. 이윽고 문이 닫히고 그 위에 ‘쾅쾅’하며 못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터져 나왔다. 내가 살아왔던 시간들이 스크린의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어린 시절 사진을 찍지 않았는데 엄마가 건네준 껌을 받아 그걸 까먹으려 한눈을 판 사이 찍힌 사진, 중학생 까까머리를 한 내가 뱃머리 앞쪽에서 브이 포즈를 잡고 사진 찍은 모습들...
"나는 잘 살아왔었나? 정말 죽는 것일까? 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았다.
1분, 1초가 1시간 같이 느껴졌다.
8년 전 아내와 같이 임종 체험을 하러 갔을 때 일이다.
내가 가장 잘 나온 사진에 검정 삭선이 그어진 영정사진 앞에서 유서를 쓰기 시작했다.
묘비명 ‘이 세상 후회 없이 잘 놀다 갑니다’ 유서 ‘정현 씨에게 그동안 못난 나를 만나 고생도 많이 하고 아이들을 잘 키워 줘서 고마웠어요. 당신을 만나서 행복했고 내가 죽는다고 슬퍼하거나 불행하게 살지 말길 바래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유서를 쓰고 나서 불을 끄고 읽어 내려갔다.
그 뒤 수의를 입고 관에 들어가 편안하게 누웠다.
관속에서 누웠있던 5분... 망치 소리, 주변의 작은 소음 하나에도 왜 그렇게 서러운 눈물은 주체 할 수 없을 만큼 터져 나왔다. 돌아가신 어머니는 어떤 생각들이 스치고 지나갔을까?
나는 세상 사람들에게 어떤 존재였을까?
여러 가지 생각들이 교차했다.
‘만약 내가 이 관속에서 나간 다음 제2의 삶을 정말 행복하게 다시 태어난 것처럼 살 것이다 ‘고 다짐했다.
어쩌면 삶과 죽음은 같은 공간에서 두 얼굴을 하고 있는 야누스가 아닐까? 관속에서는 평생 잊어버리지 못할 것처럼 다짐했으나 이내 몇 시간이 흐른 뒤에는 평소 생활에 익숙해진 듯 똑같이 행동하는 것처럼...
“난 여기 존재했지만 이제 다른 곳으로 가고 있어, 어디로 가는 걸까? 내가 사라지면 어디로 가는 걸까? 아무것도 없겠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면 난 어디에 있게 되는 걸까? 이런 게 죽음인 걸까? 아니 난 죽고 싶지 않다.” 이반 일리치에서의 독백처럼....
누구나 비슷하지 않을까? 죽는다는 것은 이반에게 명백한 현실처럼 다가오지만 주변의 사람들은 평소 생활인 것처럼 그저 누군가의 삶 같은 것이 아닐까?
나 또한 나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오늘날 우리 모두는 이반 일리치처럼 끊임없이 나의 내공을 쌓으며 나를 내보이고 증명하며 살아간다. 직업, 재산, 인스타그램의 ’ 좋아요’까지도...
그러나, 당장 내일 아침에 죽음의 순간을 맞이한다면 나는 과연 무엇을 남길 수 있을까?
톨스토이의 ’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통해 그 사람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읽는 모든 이에게 자신이 살아가는 삶의 방향을 묻고 있다.
’ 비단 죽음은 타인의 일이 아니다. 죽음은 문밖에 있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나는 무엇을 가져가고 무엇을 버려야 할까?
검소한 집, 소소한 행복, 친구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내 주위의 한두 명의 벗, 그리고 지금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 지금, 나에게 꼭 필요한 필수 리스트를 꼽아봐야겠다.
그리고 자녀들과 이웃들과 큰 배를 타고 바다를 누비다가 살기 위해 올라타는 작은 구명보트에 옮겨 타는 연습도 해봐야겠다.
지금 내게 꼭 필요한 것을 간추리는 연습은 내 삶에 버려도 좋은 불필요한 것들과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버릴 수 있게 하는 지혜를 갖기 위해서....
죽음이 슬픈 것처럼 내가 이 세상에 사라진다는 것만큼 슬픈 일이 없기에 그저 침울해야 할까?
’ 태어날 때 자신은 울지만 주위 사람들은 웃고 죽을 때 주위사람들은 울지만 자신은 웃는 그런 행복한 사람이 되고 싶다.
‘ 나의 장례식은 이런저런 고민보다는 결혼식처럼 축제였으면 한다.
나를 알고 나와 어울렸던 사람들이 모여 나를 기억하고 행복했던 순간을 나누고 한 잔의 술을 곁들이며 그저 그렇게 기억해 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