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아디다스 점퍼 하나만 사주시면 안 돼요?” 눈이 따가울 정도로 시린 날씨...
어머니 산소를 둘러보고 오던 길에 차 안에서 아버지에게 처음 옷을 사 달라고 했다.
물론 우리 집 형편이 그 당시 10만 원이 넘는 큰돈을 들여서 사줄 리는 만무했다.
세월은 아버지를 비켜 가서 창 밖의 유리창에 반사되어 마주하고 있었다.
하얗게 서리 맞은 머리카락 사이로 듬성듬성 드러난 검은 머리카락...
일자로 쭉 찢어진 반달 모양의 눈썹 아래로 희미하게 웃음 짓던 아버지의 눈...
옅은 입술 사이로 얕고 희미하게 이야기할 때마다 씰룩이던 입술...
예전에는 집안 구석구석 쨍쨍 울렸던 그 목소리...
그리고 배시시 웃을 때마다 군데군데 때운 크라운 치아까지도 모든 게 달라져 있었다.
어린 시절 나는 아버지가 걸리버의 여행기의 거인처럼 무서웠다.
다음 날 모든 동네가 회색, 잿빛인 곳에서 오로지 중앙의 화구만이 붉은 태양처럼 빛나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가 일하는 주물 공장에서 한 달간 일을 하고 번 돈으로 아디다스 점퍼를 사라고 허락을 받았다.
뭐가 됐든 그 길로 아버지와 같이 출근을 했다.
아침 7시 아직 밖은 어스름할 때 은갈치의 은색보다 빛나는 사각 알루미늄을 들고 붉은 태양처럼 빛나는 화구에 넣는다.
이윽고 붉은 태양은 쿨럭이며 진한 마그마를 뿜어낸다.
그걸 바가지 주걱에 담아 주물 틀에 넣는다. 3~4 시간 후에 회색빛의 형틀을 한 모양이 서서히 드러난다.
아버지는 그 일을 반복한다. 아침 7시 출근해서 일을 시작하면 오전에 7~8개, 오후에 13~14개의 조각이 아버지의 손에서 만들어지면 그날의 일은 마무리된다.
한겨울인데도 땀이 비 오듯 한다. 붉은 화구 속으로 빨려 들어가지 않기 위해 바가지를 꽉 잡던 손과 입이 바짝바짝 말라서 수시로 물을 먹어도 입에서는 단내가 났다.
점심시간이 이렇게 기다려진 건 난생처음이었다. 밥을 고봉밥으로 퍼고 또 펐다. 그 밥을 10분 내로 먹고도 허기가 졌다.
아버지는 도대체 이 일로 어떻게 하면서 30년 동안 견뎌 왔을까? 아버지의 숙명이기에, 아니면 죽은 아내를 뒤로 하고 남겨진 자식들을 위해서..
갑자기 그날 차 안에서 아버지에게 떼쓰던 내가 미워졌다. 지금 내 나이 40대 중후반 그 당시 아버지와 비슷한 나이..
나는 나의 아이들을 바라보며 어떤 생각들이 겹쳐졌을까?
아버지는 그 당시 어떤 마음이 스치고 지나갔을까?
5월 8일 어버이날에도 아버지에게 전화를 드리지 못했다.
그동안 연락하지 못한 미안한 마음에 아니면 나 자신에게 자책했던 마음이 엉뚱하게 아버지에게 화풀이를 할까 봐서...
그 당시 보여 주고 싶지 않고,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을 모아 놓은 방, 그런 방들을 보여주기 싫었다.
이제 나이가 들어가매 가끔은 그 방문을 활짝 열고 묵은 먼지를 털어내고 싶은 때가 가끔 있다. 또 가끔은 누군가의 마음을 열어보고 싶어서 조바심이 날 때도 있다.
그래 볼멘소리라도 용서를 구해 보자..
“감사했다고 아버지 덕분에 잘 자랐다고 그동안 고생하셨다고 그리고 미안했다고” 그러고 나면 속이 후련해질 것 같다.
그리고 마주 앉아 순댓국에 소주라도 한잔 따라드려야겠다.
그리고 아버지의 이름을 불러드리고 싶다. 그리고 그리운 아버지의 이름을 불러본다.
그리운 마음이 아버지에게로 한걸음 다가가게 만든다. 아버지의 힘든 모습이 보이거든 그의 이름을 불러주며 말해야겠다.
‘지금 당신이 자랑스럽습니다. 당신이 있어 행복합니다’하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