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일아, 나 한 테로 패스해’ 축구부였던 대일이가 3~4명의 아이들을 제치고 코너 부근에서 올려준 크로스를 발을 갖다 댔다.
골키퍼를 지나 온 공은 발이 아닌 나의 무릎을 맞고 골문 안쪽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우승 후보인 6학년 5반을 1:0으로 이기고 그해 반 대항전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골이 그물망에 철렁하는 순간, 동시에 아이들의 터져 나오는 함성은 아직도 나의 귓속을 먹먹하게 만든다.
반 대항 축구 대회에서 공격수를 도맡아서 했다. 나는 어린 시절 아이들과 함께 축구공 하나로 해가 지도록 운동장에서 좋아하는 아이였다.
나의 꿈은 한국에서 제일가는 스트라이커였다. 그 당시 학교에서는 반대항전에서 잘하는 얘들을 코치님이 축구부로 스카우트를 했다.
매일 좋아하는 축구를 배우고 맛있는 고기와 빵을 마음껏 먹을 수 있어서 금상첨화라고 생각했다.
그날 추천서를 들고 집으로 개선장군 마냥 의기양양하게 들어갔다.
나의 바람과는 달리 마루 바닥 아래 덩그러니 놓인 추천서처럼 나의 바람대로 되지는 않았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추천서를 아래에 두고 울그락불그락 얼굴색이 변하셨다.
부모님은 예체능이 아닌 공부를 잘하는 자녀를 원하셨다. 그 당시 예체능은 돈이 많이 들고 먹고살기 힘들다는 이유로...
다음날 아침 아버지는 단호하게 안된다고 말씀하셨다. 어린 나이에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게 하는 아버지가 미웠고, 그런 아버지에 동의하신 어머니도 미웠다.
처음으로 내가 하고 싶다는 꿈이 꺾여 나간 이후로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몰랐다. 그저 부모님이 혼나지 않기 위해 성적을 잘 받아오면 기뻐하시는 모습이 보기 좋아서 열심히 했다.
누구나 한 번쯤 해봄직했을 법하기도 하고 꿈꿔본 아메리칸드림이 있었다. 성적에 맞춰 들어온 대학시절 때 4학년 때 이대론 안 되겠다 싶어서 우연히 학교에서 진행한 미국 ‘WORK AND TRAVEL’ 6개월 단기 비자로 건너온 미국에서 내가 해보고 싶은 꿈이 생겼다.
나의 일터는 미국 중부에 위치한 내시빌 오프리랜드 호텔이다. 축구장의 2~3개를 붙여 놓은 크기로 한국의 가장 큰 한림 식물원을 옮겨 놓은 듯한 거대한 유리천장 아래로 야자수와 나무들 사이로 거대한 폭포수가 아래로 떨어지고 중앙에 원형을 따라 파 놓은 둥근 강이 흐른다.
그 위로는 베니스와 같이 곤돌라 위에 하얀색과 검은색의 줄무늬를 입은 뱃사공이 노를 저으며 관광객들을 태우고 느릿느릿 노를 저으며 이야기한다.
그곳에서 나의 일은 ‘Banquet set-up’이다. 아무것도 없는 연회장에 결혼식, 국제회의가 열리는 날이면 200평 되는 공간에 40~50개 책상과 의자를 보기 좋고 세팅하고 그 위에 테이블의 낙서와 나무의 스크래치를 가려주는 하얀색 비단 리넨을 두르고 여자들이 파티에 갈 때 즐겨 끼는 블링블링한 귀걸이링처럼 둥근 핀을 꽂아 18세기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의 파티장처럼 꾸미는 일을 했다.
처음엔 호텔의 체크인대처럼 우아한 정장을 입고 ‘May I help you?’하며 그들의 룸 객실 타입, 묵을 날짜 등을 꼼꼼하게 체크하는 나를 상상했지만 현실은 영어도 안되고 고객들과 접점과 수많은 클레임 호텔의 신뢰도와 버금가는 그 자리는 언감생심, 나만의 김칫국 시나리오였다.
이집트에서 이민 온 2세이며, 넉근히 몸무게가 120킬로 이상 나가는 나의 여자 매니저인 엠마와 항상 조회 시간 오늘 몇 명의 연회가 있고 어느 연회장을 세팅해야 한다는 말을 매니저가 하면 뒤돌아서 ‘Oh, shit!’를 나지막이 뱉으며 묵묵히 일했던 흑인 앤드류와 한 팀이었다.
처음 해보는 일이라서 내 키보다 큰 둥근 테이블을 굴러서 옮기고 의자를 창고에서 꺼내오고 불과 2~3시간 만에 해야 하는 일은 처음이라 힘들었다. 우리가 세팅을 한 뒤로는 ‘Catering’ 팀이 그 연회장의 성격에 맞춰 핑거 푸드 때로는 스테이크 등 화려하게 꾸며졌다.
화려한 연회장 끝나고 다음날 우리는 남겨진 테이블보, 책상, 의자를 정리하며 언제 그랬냐는 듯 원래 그런 공간인 것처럼 텅 빈 채 모든 것을 쓸어갔다.
나의 일은 이 일 말고도 한 가지가 더 있었다. 호텔 앞 애플비라는 패밀리레스토랑에서 밤 11시쯤 레스토랑의 영업이 끝날 즈음에 출근을 한다.
들어서자마자 바닥에는 끈적끈적한 무언가에 신발에 쩍쩍 달라붙고, 입구 쪽 끝으로는 가로 50센티, 세로 1미터가량의 식기세척기가 ‘우우우웅, 쉬이 이잉’하면 환영인사를 하듯이 돌아가고 있다.
그 옆에 컵 식기세척기는 방금 샤워를 끝냈는지 ‘쏴’ 소리와 함께 은색문이 고급스포츠카의 문작처럼 하늘을 향해 열림과 동심에 마술사가 아리따운 여인을 사라질 때 만들어는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오른다.
그 뒤에는 철제 트레이와 컵을 담을 수 있는 가운데 뾰족한 기둥이 박힌 트레이가 서 있었다.
그 옆으로 설거지할 그릇이 개수통에 어지럽게 놓여 있고, 두 번째 라인은 튀김기와 화구 네 개짜리 가스레인지가 있고 그 밑으로는 어지럽게 떨어진 감자튀김 부스러기와 작은 튀김덩어리가 어수선하게 널려있었다.
그 끝에는 코카콜라와 펩시, 스프라이트 등을 폭포수처럼 뽑아내는 기계가 있었다. 매니저는 잠깐 쉴 때 힘들 때는 언제라도 음료수를 뽑아 먹으라고 영어로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나의 일은 다 끝나 레스토랑의 마지막에 들어가 설거지와 바닥 청소, 최종적으로 음식물 쓰레기를 처리하는 일이다. 미국까지 와서 영어를 배우러 왔는데 이런 일까지 해야 하나? 하며 현타가 여러 번 왔었다.
시간이 흘러 개수대의 그릇이며 바닥의 끈적끈적함이 어느 정도 사라지고 난 주방의 모습을 보면 개운했다. 마지막 음식물 처리를 미션을 남기고는 코카콜라 한잔을 뽑아 느긋하게 홀에 나간다.
여기가 컨트리 음악의 본고장인 것처럼 ‘앨비스 플레슬리’의 전신을 아름답게 표현한 입간판과 로큰룰 음악이 흐르고 내 주변의 모든 것이 고요하며 나를 둘러싸며 앞의 피로를 모두 날리게 해 주었다.
이렇게 고생해서 모은 돈 4천 달러와 추억을 뒤로하고 나머지 두 달은 ‘그레이 하운드‘라는 고속버스를 타고 미국을 혼자 여행했다.
낮에는 대도시에 내려 그곳을 여행하고 밤에는 그레이 하운드를 타고 다른 도시를 이동하고 피곤함도 잊은 채 다녔다. 그러고는 마지막 15일은 아버님의 친구가 계신 오리건주 포틀랜드로 향했다.
오리건주는 워싱턴주 주도 시애틀 밑에 있는 곳이다. 농구팀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가 유명한 동네이다. 그 집은 다운타운에서 차로 30~40분가량 떨어진 외곽에서 식료품점을 하고 있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머문 하루하루는 행복했지만 곳 가야 하다는 생각에 우울해지기도 했다.
한 번은 바쁘신 아저씨에게 부탁하지 않고 다운타운에 갈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다 한쪽에 놓인 자전거를 보고 ’ 이거다 ‘ 하고 쾌재를 외치며 다음날 곧바로 시행에 옮겼다.
일단 자전거로 20분 거리에 있는 버스정류장에 타고 갔다. 2차선 도로 옆으로 차가 다니는 길 옆을 아슬아슬하게 피하고 가파른 오르막길도 오르고 마침내 정류장에 도착해서 자전거를 버스 앞에 붙이고 다운타운으로 향했다.
이런 생각을 해 낸 것도 대단한데 혼자 다운타운 여행이라니 벌써 심장이 요동치지 시작했다.
내 인생의 최고의 모험이었다. 가끔 꿈속에 자전거를 타면 지나온 길과 숲 속, 도로 구부정한 모습이 나타나곤 한다.
그렇게 도착한 다운타운에서 내가 좋아하는 도서관도 둘러보고 높은 빌딩 숲사이로 거닐어 보기도 하고 트램을 타고 다운타운 시내를 다니는 지하철을 타고... 그러다 잠이 들어 엉뚱한 역에 내려 당황한 나머지 길을 잃고 역무실에 들어가 말문이 막혀 엉엉 울고 말았다. 그사이 구세주처럼 짠하고 등장한 역무원의 친절로 집 전화번호를 물으며 통화해 주었고 전화를 받은 아주머니를 설명 덕에 무사히 집에 오기도 했다.
오기 며칠 전에는 아저씨의 처남과 친해져서 시애틀로 놀러를 가기로 했다. 미국 수산물로 유명한 파이크 플레이스마켓과 스페이스 니들을 구경하고 다녔다.
그렇게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지 어느덧 귀국 마지막날 밤 처남과 술을 마시면서 이런저런 이야기하던 중 나 한국에 가기 싫다고 여기서 살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자 불법체류하면 된다고 비자를 사서 일을 하면 미국에서도 세금을 그 비자로 세금을 내기에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이상 잡지 않는다고 그렇게 돈을 모아 결혼을 해서 여기서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는 시민권을 받고 그 아이의 보호자가 없으니 내가 부모라고 소송을 걸어 시민권을 취득하면 된다고 말해 주었다. 그렇게 눌러앉으려고 다짐을 하고 지금의 아내인 여자친구에게 당신에게 전화를 했다.
나 미국에서 살려고 하는데 ’ 당신 여기로 와서 나랑 살 수 있겠어?’라고 뜨뜻 미지근한 프러포즈였다. 그러나 그녀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 후 방법이 없던 나는 어쩔 수 없이 다음날 귀국길에 올랐다.
어린 시절부터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살아왔다. 모두가 그렇겠지만.. 그런 ”나는 안돼” “내가 되겠어?” 등 부정적으로 생각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지금은 '까지껏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이다.'라고 생각하면 되고 좋고 안되면 말고 라는 생각으로 그냥 하는 것이다. 지금 내면 속에서 나를 자극하는 호기심, 이상, 즐거움, 액티 비티 등 다양하다. 나에게 삶이란 늘 새롭고 내가 못해본 여러 가지를 해보고 싶고 주말이 기다려진다. 실수하고 실패를 해봐야 방법도 알고 비로소 세상이 열린다.
그날을 뒤로하고 아등바등 앞만 보며 살아왔다. 독서모임을 통한 나를 알아가고 내가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나를 치유한다. 나도 모르게 책 속 뒷면에 가려진 나를 찾아간다. 어느새 책을 통해 자기부정(否定)을 넘어 자기 치유(治癒)로 나아간다.
어느새 나는 책을 통해 새롭게 나를 변화시킨다. 그래,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이다. 독서 치유사, 나의 내면 속에 잠재되어 있던 응어리, 비밀스러운 방, 미친 사연을 책을 매개로 밖으로 끄집어내어 어린 도현이를 치료한다.
그렇다. 독서치유사가 내가 꿈꾸는 제2의 인생이다. 그래서, 나는 독서 치유사를 위해 한 달에 책 3권 이상 읽기, 꾸준한 독서모임, 심리학 공부 등 시나브로 나의 꿈을 위해 준비해 나가 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