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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작세 Nov 24. 2021

장모님. 당신은 한없이 자애로우신 저의 엄마셨습니다.

참 좋은 만남

36년 전. 11월 24일. 아내 19번째 생일날.

저는 딸을 훔쳐간 도둑놈으로 어머님을 처음 만났습니다.


1985년 11월 23일. 

여자 친구와 만난 후 맞이 하는 첫 생일이었기에 제 친구들과 함께 아내 생일을 축하해주기 위해 모였습니다.

여자 친구는 타향으로 대학교에 와서 자취 중이었지요.

밤늦게 여자 친구를 자취집에 데려다주면서

생일 당일인 24일 일요일에(음력으로 생일을 지내는데 마침 일요일이었습니다.) 

둘이 처음으로 함께 목포로 기차여행을 하러 가기로 약속하였습니다.


다음날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수화기 너머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고, 울먹이며 말했습니다.

'여행 못 갈 것 같아요. 어제 엄마가 오셨어요.'

가슴이 덜컥 내려앉고, 온몸에 전율이 흘렀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저는 겨우 21살이었고, 

밤늦게서야 여자 친구를 들여보낸 놈이었고, (집에서는 아주 착한 큰 딸이었습니다.)

여자 친구의 부모님과는 일면식도 없었으니까요.


제 머리는 재빠르게 회전하였습니다.

'어젯밤에 여자 친구는 야단을 많이 맞았을 것이다. 여자 친구를 힘든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나 밖에 없다. 딸의 남자 친구를 보지 않은 상태에서는 불안하지만 막상 보면 불안감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 이치이다'

msg 없이 딱 저 생각을 했습니다.

잔뜩 겁이 났지만 다른 뾰족한 방법이 없었습니다.


'지금 내가 갈게'

'아니요. 오면 안돼요. 엄마가 화가 많이 나있어요.'

'그러니까 내가 지금 가야 한다고. 기다려'라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온 가족이 한 상에 둘러앉아 아침밥을 먹고 있었고, 방이라고 해봐야 겨우 네 평 남짓 하였기에

부모님께서는 제 전화 내용을 다 들으셨습니다.

'지금 가봐야겠습니다.'

'그래라'

다행히 대학교에 들어갈 때 막내 고모께서 선물로 해 주신 양복이 있었기에

부랴 부랴 갈아입고 택시를 잡아 타고 갔습니다.(당시에는 택시를 탈 엄두도 못 낼 만큼 돈이 없었지만, 돈보다는 일분일초가 급했으니까요)


자취 집 대문을 통과하여 자취방 문을 두드릴 때까지의 긴장감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겪은 어떠한 긴장감도 이때를 능가할 수 없을 정도였으니까요.

'똑똑'

방 문이 열렸습니다.

눈에 확 들어온 중년 여성은 멈칫할 만큼 강한 인상을 가지셨었습니다.

누가 봐도 여장부 상이었지요.

더군다나 잔뜩 굳은 얼굴이셨으니 더욱더 그렇게 보였습니다.

'누구요'

'따님 남자 친구입니다.'

여자 친구는 사색이 되어 있었고, 분위기는 아주 무거웠습니다.

'들어오쇼'


이것이 어머님과 저의 첫 만남입니다.

질문 공세가 이어졌지요.

잔뜩 긴장한 상태였지만, 전혀 티가 나지 않게 또박또박 대답하였습니다.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약 10여분~20분 정도의 대화였던 것 같습니다.

대화 후에 어머님은 저와 여자 친구만 방에 남겨둔 체로 집주인 방으로 가셨습니다.

저와 여자 친구는 당황했지요.

둘만 남겨 놓고 가시다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어머님은, 판단력이 좋으시고 배려심이 많은 분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았지만,

이때 어머님은 '이 정도면 괜찮구만. 둘 다 긴장했을 텐데 내가 자리를 비켜줘야지'라는 생각을 하셨었다고 합니다.

대단하시지요.

(자취생을 들이기 위해 부엌 딸린 작은 방 하나를 만들어 놓았고, 이 방과 주인집 거실 사이에 문이 있었습니다. 이 문은 잠겨 있어서 드나들 수 없고, 부엌과 연결된 작은 문과 방 출입문이 있는 구조였지요)


방에 단 둘이 남았지요.

둘 다 조금은 긴장이 풀렸지만, 그래도 여전히 굳어 있는 상태였습니다.

여자 친구는 더했지요. 안아줬습니다.


어제 토요일. 

제 친구들과 함께 생일 축하를 해주기 위해 여자 친구를 데리고 가기 전에,

토요일 오전에 수업 끝나고 여자 친구 자취방에 갔었습니다.

아무리 주인집과는 남이라 할지라도, 

여자 친구가 살고 있는 집을 가면서 그 집주인에게 인사를 하지 않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래서 없는 돈 끌어모아서 과일을 사가지고 가서 주인집 아주머니께 인사를 드렸었지요.

대화도 했었고요.

그런 후에 자취방에서 점심을 해 먹었었습니다. 밥은 전기밥솥에 했고요.

이 전기밥솥은 주인집 거실과 연결된 문 옆에 있었습니다.


여자 친구 말에 의하면,

어제 어머님은 딸의 생일을 축하해주고 미역국을 끓여주기 위해 올라오셨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핸드폰도 없던 시절이고 주인집 전화로 연락을 해야 했었기에

오신다는 말도 없이 오신 것이지요.

와보니 딸이 없었습니다. 기다리면서 주인집 아주머니와 얘기를 했다네요.

주인집 아주머니는 어머님께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남자 친구가 담배를 많이 피더라고요. 방 문틈으로 연기가 많이 나올 정도로.'


저는 예나 지금이나 담배를 피우지 않습니다.

주인집 아주머니는 전기밥솥에서 나온 김을 보고 그렇게 생각을 한 것이지요.

그래도 그렇지, 냄새라는 것이 있는데 

왜 그렇게 생각하셨고, 왜 그렇게 말을 했는지 지금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주인집 아주머니에게는 여자 친구 또래의 딸 두 명이 있었는데,

아마 제가 너무 잘 생기고, 의대생이고, 말도 잘하고 하니까 질투가 나지 않았을까 라는

짐작만 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딸을 훔쳐 간 도둑놈이 담배까지 엄청 피워댔다고 하니 

어머님의 심정이 어땠을지 가히 짐작이 되었습니다.

토요일 밤부터 제가 어머님을 뵈러 가기 전까지의 상황은 지금 생각해도 끔찍합니다.

어머님이나 여자 친구나 심적 고통이 심했을 것입니다.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정확히 아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것인지를 배울 수 있었지요.


이 후로 어머님은 저에게 참 잘해주셨습니다.

저는 방학만 되면 여자 친구 집에 가서 일주일 이상 살고 오곤 했었지요.

서로 편해져야 한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다가 결혼을 하고,

세 명의 아이가 태어나서, 아이들을 키워주시다시피 하셨고,

저희 부모님들을 처가가 있는 곳으로 이사를 시켜서 6년여 동안 제 어머니를 친언니 대하듯이 섬기셨습니다.


가난한 집에서 힘들게 살아온 저를 항상 가엽게 여기셔서

아내에게 '김서방 불쌍하고 외로운 사람이니 잘해줘라'라고 자주 말씀하셨지요.

저희 부모님께 못한 얘기를 장모님께는 했었습니다.

저에게는 친엄마와 같았지요.


제 엄마께서 11년 전에 돌아가신 후,

저는 작년까지 자주 엄마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었고, 

4년 전 아버지의 배신적인 행동들을 알게 된 후로 공황장애까지 겪어야 했었습니다.


겨우 금년에 벗어나나 싶었는데,

다시 갑자기 또 한 분의 엄마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한 번 겪어보았기에 다시 같은 것을 겪고 싶지 않아서 빠져나오려고 몸부림치고 있지만,

솔직히 자신이 없습니다.


그래도 빨리 빠져나와야겠지요.

그래야 아내도 빼낼 수 있을 테니까요.

하던 일상생활을 그대로 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기에,

하나하나 다시 시작하고 있습니다.


오늘이 아내의 55번째 생일입니다.

어머님과의 첫 만남에 대해 글을 쓰기 위해 달력을 찾아보고 깜짝 놀랐네요.

아내 생일의 일치

우리 나이에는 생일을 음력으로 하지요.

저희 부부는 아이들이 기억하기 쉽게(그래야 한 번이라도 더 챙겨줄 것이기에)

진즉부터 생일을 양력으로 하고 있습니다.

태어난 해의 음력 생일이 양력으로 며칠인지 찾아봐서 태어난 날 양력으로 하는 거지요.


신기하게도,

아내가 태어난 1966년 음력 10월 13일이 양력으로 11월 24일(현재 지내고 있는 생일이죠)이었는데,

여자 친구를 만나고 처음 맞이했던, 어머님을 처음 만났던 

1985년 음력 10월 13일 아내의 생일이 양력으로 11월 24일이었습니다.

이런 일이 누구나 있겠지만,

그래도 신기했네요.


이 땅에 사시는 동안,

동생들을 돌보고, 가족을 돌보는 것에 혼신을 다하셨던 어머님.

지금은 천국에서 평안하시리라 믿습니다.


사랑합니다.

나의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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