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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작세 Jan 12. 2021

고양이의 슬픔에 함께 하다

누가 고양이의 목에 줄을 달았는가?

우리 집은 쌀가게를 했었다.

요즘에는 도시에서 쥐를 보는 게 흔한 일은 아니지만,

예전에는 학교에 쥐꼬리를 가져가면 상을 줄 만큼 쥐가 많았다.

오죽하면 정부에서 쥐약을 공짜로 나누어 주고

“일시에 쥐를 때려잡자”라는 표어와 함께 날짜와 시각까지 지정해줬었다.

쌀가게에는 쥐가 더 많을 수밖에 없었기에 당연히 고양이를 키웠다.

요즘 고양이들은 나약해지고 배가 불러서 쥐를 잡는 것을 게을리 하지만,

예전 고양이들은 쥐만 보면 득달같이 달려들어 잡았다.

우리 집 고양이도 쥐 사냥꾼이었다.

새끼를 낳아서 기를 때는, 잡은 쥐를 새끼들 앞에 던져서 교육을 시켰다.

고양이 앞에 쥐는 말 그대로 얼어붙어 있었다.

톰과 제리 영화에서처럼 쥐가 충분히 빠르게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쥐는 옴짝달싹 못하고 있었다.

온몸의 근육이 다 굳어버린 듯했다.     


고양이는 참 깔끔한 동물이다.

틈만 있으면 얼굴을 씻어댄다.

사막에서 생활한 습성이 남아 있어서 배변을 본 후에도 꼭 확실하게 묻어버린다.

사람을 귀찮게 하지도 않는다.

개보다 사람에 대한 배려가 더 많은 것인지, 

아니면 자신 외에는 관심이 없는 것인지는 물어봐도 대화가 통하질 않으니 알 수가 없다.     


우리 집 고양이도 예외는 아니었다.

“나비야‘라고 부르면 어디서든지 온다.

부르지 않으면 먼저 다가오는 일은 거의 없다.

우리 집 나비는 사람도 할 수 없는 역할을 감당하는 충실한 일꾼이었다.

받는 대접에 비해 엄청난 일을 했다.

그것도 아주 즐겁게 열심히 했다.     


낮에는 장사를 해야 했기에 목줄을 해서 한쪽 구석에 있도록 했다.

중간에 한 번씩 풀어주기도 했는데,

어느 날 나비가 아무리 불러도 오지 않았다.

좁은 방, 좁은 가게인지라 있다면 눈에 보이지 않을 리가 없었다.

부엌 뒤에는 주인집과 세 들어 사는 가게들 사이에 작은 통로가 있었다.

그리 가보았는데, 나비가 주인집 담에 목이 매달린체 죽어 있었다.

쥐보다 더 큰 동물이 죽은 것을 본 것은 처음이라 나는 너무 놀랐다.


초등학교 4학년이 죽음인들 얼마나 알겠는가.

그런데 너무 슬펐었다. 마음이 너무 아팠었다.

목에 줄이 달린 체 담을 넘어 다니다가 그 줄이 걸려버린 것이었다.

어딘가에 있다가도 부르는 소리만 들리면 달려오고,

한 번도 집을 나가서 안 들어온 적이 없었는데,

왜 줄을 매달아 놓았는지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부모님은 이날 이후로 더 이상 고양이를 데려오지 않았다.     


요즘 고양이들에 비하면 당시의 고양이들은 푸대접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할 일을 충실히 했다.

혹시 깜빡 잊고 먹을 것을 주지 않아도 불평 한마디 없었다.

고양이의 발톱은 상당히 강하고 날카롭다.

개와 싸워도 결코 주눅이 들지 않는 이유는 이 발톱에 대한 자신감이다.

고양이 발톱에 한 번 할큄을 당한 개는 다시는 고양이에게 달려들지 못할 것이다.

고양이에게 발을 달라고 하고 만질 때, 고양이는 발톱을 깊숙이 넣는다.

그래서 부드러운 발을 만질 수가 있다.

결코 잘해주는 주인에게 발톱을 드러내는 일이 없다. 

물론 못된 주인은 고양이 발톱의 매운맛을 톡톡히 보게 된다.


고양이보다 훨씬 못한 사람이 세상에는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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