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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작세 Sep 14. 2021

87세 할아버지께서 나를 울렸다

나도 늙고 있다.

"아무리 안약이 큰 부작용이 없다고 해도 환자를 보지 않고 그냥 처방해 드릴 수는 없어요"

"뭐라고?"

잘 안들리시는 모양이다.

다시 큰 소리로 말씀드렸더니

"아파서 움직이도 못한디 어떻게 해. 약이라도 타다 줘야지"


이 대화가 오간 후 일 년 반 동안 할아버지께서는 매달 안약을 타러 오셨다.

아무래도 한 번은 봐야 할 것 같아서 말씀드렸다

"다음에는 꼭 모시고 와야 해요. 휠체어라도 타고 오셔야 해요. 어떤 문제가 있는지도 모르니"

알았다고 가신 할아버지께서 2주가 지난 후에 할머니를 모시고 오셨다.

휠체어는 타지 않으셨고, 걸어오시는데 걸음이 영 불편하시다.

86세이시니 어찌 보면 너무 당연한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걸어서 10분 거리지만, 

할아버지 할머니께서는 30분 동안 걸어오셔야만 했다.


"한 번은 봐야 해서 힘들더라도 오시라고 했어요"

눈만 껌뻑거리신다.

잘 안 들리신다.

웬만한 소리에도 못 들으신단다.

보청기도 하지 않으셨다.

두 분 다 잘 안 들리셔서 악을 쓰다시피 말씀을 드려야 했다.


"백내장이 있어서 눈 안쪽이 조금 좋지 않지만 수술받으시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대기실에서 기다리시는 분들은 안에서 큰 싸움이 벌어졌는지 오해할 만큼

서로 큰 소리가 오갔다.

"작년에 다른 안과에서 연세가 많으셔서 수술받고 실명할 수도 있으니 하지 말라고 했어"


기초 검사만 했었는데, 결국 정밀 검사를 해야 했다.

모든 검사가 끝나고 다시 설명을 드려야 하는데 

목에 너무 무리가 가면 진료에 차질이 있을 것 같았고,

자녀 분들께 할아버지께서 설명을 하셔야 하는데,

나도 기억이 가물가물 하는 나이이기에

A4 용지에 글씨를 크게 쓰면서 설명을 드렸다.

실명의 위험성은 조금도 없는 눈이었기에, (다른 안과에서는 연로하셔서 수술을 만류하는 과정에서 말에 오해가 생긴 듯하였다.)


설명이 다 끝나고, 갑자기 할아버지께서

"늙은이한테 이렇게 잘해줘서 너무 고맙소"

하면서 울먹이신다.

나도 순간 울컥하고 말았다.

당연한 것을 그냥 해드렸을 뿐인데...

연신 고맙다는 말을 하시면서 나가신다.

그 정도 인사를 받을 만큼 해드린 것도 아닌데.


누구나 늙는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입니다.

얼마 전에 할머니에게 담배 심부름을 시키면서 할머니를 괴롭혔던 10대들이 있었습니다.

자신들은 결코 늙지 않을 것처럼...

늙는다는 것도 서러운데, 

그동안의 노고와 경륜에 찬사를 보내며 대접을 해 드려야 하는데,

그렇지 아니하는 이 사회가 할아버지의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했었는지...

현 사회 풍조를 하루 이틀 안 것도 아님에도

유난히 마음이 아팠던 이유는

아마도 내 귀에 대고 조용히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씀하시는 할아버지의 마음이

느껴져서 일 것입니다.


요즘에는 "나이 먹은 게 뭐 자랑이냐"라는 말이 난무합니다.

누구나 먹는 나이인데, 자랑을 할 생각도 없는데...

솔직히 나이 먹은 것은 자랑입니다.

먹고 싶어 먹은 것은 아니지만,

나이를 먹어 가면서 쌓아온 것들이 있고,

설령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 할지라도, 

험난한 세상 잘 이겨내고 버텨 왔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나도 늙어 가고 있고,

지금은 노인 소리를 들을 정도는 아니지만,

귀가 점점 멀어 가고, 눈이 침침해지고, 움직이는 게 힘들어질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낍니다.


나이대접은 꼭 해줘야 합니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나이 먹은 사람은 그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자녀들로부터도

나이대접받아야 합니다.

나이대접 안 해주는 자녀는 모든 수단 방법을 동원하여 가르쳐야 하고,

가르쳐도 도저히 안될 경우에는 과감히 손절해야 합니다.

각자가 자신의 자녀를 제대로 세워 놓지 않으면,

결국 나에게도 부메랑이 되어 돌아와

담배빵에 시달리게 될지도 모릅니다.


* 대문 사진 : https://bbprincess77.tistory.com/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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