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대한 솔직하게 대답해 달라는 토스 컬처인터뷰의 포문은 좀 이례적이었다. 인터뷰란 뷰티 콘테스트에 출연한 지원자와 그 안의 이면을 속속들이 밝혀내려는 면접자 간의 밀당인데, 그걸 한방에 걷어내려고 하는 시도가 독특했었다.
모범답안을 제시하려던 이성이 그 멘트에 순간 흐려졌는지, 나의 long-term goal은 social impact를 추구하는 것이란 말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웬 social impact? 넌 그럼 여태 그런 삶을 살았니? ” 밀려드는 공격에, 내가 이 이야기를 왜 했지 싶었다. 그러나 내가 이런 사람이라는 주장은 언제나 내가 승리할 수밖에 없다. 왜냐면 나의 가치관/꿈/열망을 다른 사람이 재단하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학교 공부는 시험 결과라는 목적 완수 이외에, 호기심 충족도 있었다. 이 세상은 어떻게 이루어졌고 과거는 어땠고 미래는 어떨 것 같다는 이야기의 총합이 학교에서 배우는 내용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교과서의 내용이 이데올로기로 포장한 액자라는 점에 충격받은 것은 여러 책을 읽으면서였다. 고등학교 때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읽으면서 어떻게 이렇게 중요한 현대사를 역사 시간에 통으로 빼놓고 다루지 않는가에 현타가 왔던 것 같다.
서울대 경영학과는 나의 원 전공이고, 사회학과는 복수 전공이다. 대부분은 반대인 경우가 많지, 이렇게 찍힌 졸업장은 잘 없을 것이다. 사회학뿐 아니라 미학, 서양사학 등 인문대의 전공 수업을 들으면서, 고등학교 때 꼭꼭 숨겨졌던 지식의 창이 자유롭게 열렸고, NGO 등에서 자원활동을 하면서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었다. 자본주의 사회는 기울어진 운동장일 수밖에 없고, 그렇지만 그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의미 있는 일을 하며 사회에 기여하고 싶다는 건 중요한 열망이 되었다.
ESG가 부상하면서 나는 삼성자산에서 ESG 채권을 투자하는 기관 투자자가 될 수 있었다. 토스뱅크는 중저 신용자에게 신용을 공급하는 비즈니스 모델을 가지고 있었고, 그 미션을 달성하기 위해 홀로 하루에 7천억의 채권을 북에 담은 날도 있었다. 뮤직카우에서는 압류 직전이던 어느 저작권자분의 창작물을 정당한 가치를 드리고 사 오면서, 우리는 이런 미션을 가지고 있다고 다 같이 뿌듯해했던 기억도 있다.
나의 열망은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동력이기에, 별반 다르지 않은 일상 속에서도, 이 욕구는 고개를 들고 나와 내가 하는 일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그렇게 내게 의미 있는 일을 찾고 나의 미션과 세상의 미션을 일치시켜 나가는 과정이 개인의 커리어의 여정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