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는 어느 생활협동조합의 조합원이다. 2010년쯤에 첫 출자를 해 조합원이 된 이후 우리 부부는 매주 한 번꼴로 그 생협의 집 근처 매장에서 장을 본다. 단골인 셈이다.
아내는 지역 분회에서 마을지기, 대의원, 운영위원 등을 맡아 일하고 있다. 조합에 관심과 애착이 많은듯하다. 내가 은퇴한 후로는 집안에 일꾼 하나가 늘어 가사 일에 여유가 생겨선지 조합활동에 더 분주하다. 심지어 나는 기존 일(가사 보조)에 더해 아내의 활동을 도와 – 주로 회의자료 작성 정도지만 - 주기까지 한다.
하루는 뜬금없이 아내가 괴산에 놀러 가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속으로 ‘웬 괴산?’하며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니 아내는 의구심을 일소하려 서둘러 자초지종을 밝혔다. 아내가 활동하는 생협이 괴산에 조합원을 위한 라이프 케어 시설을 운영하고 있는데, 10년 이상 가입 조합원에게 시설 내 호텔에 하룻밤을 무료로 숙박할 수 있는 혜택을 준다는 것이다.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니 시설 안에는 호텔 외에 공방, 한의원, 수영장, 사우나, 레스토랑, 유기농 매장에다 조합원을 위한 각종 치유프로그램을 갖추고 있는 이른바 힐링 시설이었다. 지난봄 아내가 활동가 워크숍을 1박 2일로 다녀왔었는데 바로 그곳이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집 밖에서 자는 걸 싫어하는 아내가 공짜니 가자고 다그치는 게 조금은 낯설었다. 채근해 좀 더 물어보니 호텔과 시설이 너무 쾌적하고 좋았다는 것이다. 마침 조합원은 자기를 포함하여 2인까지 무료여서 나에게 제안한 것이다. 사실 그곳은 대중교통으로 접근하기 어려운 외진 곳에 있어 장롱면허인 아내는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처지다. 나는 내 쓰임새를 뻐기며 못 이기는 채 받아들였다.
▲ 아내가 활동하는 생협에서 운영하는 괴산 시설의 전경 그림 ⓒ 정승주
가을 색으로 물들어 가는 10월 하순의 예약 날, 우리 부부는 사회복무요원으로 근무하는 작은 아들을 쫓아내듯 출근시키고 서둘러 출발했다. 이번 여행(?)은 아무 준비 없이 가자고 해서 군것질거리조차 사지 않았다. 간만의 장거리 외출이어서 약간은 긴장해 운전하고 있는데 아내가 혼잣말하듯이 말했다.
“우리 둘만 여행하는 건 신혼여행 이후 처음인 거 알아?”
아내의 말은 조금 황당하기도 하고 꿈속에서 듣는 듯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결혼 30년이 코앞인데 정말 그런가 싶은 것이다. 그러고 보니 제주도로 간 신혼여행 이후에 둘만 떠난 여행이 떠오르지 않았다. 결혼하고 5~6개월 지났을 때 단둘이 강릉으로 여행 갔던 기억은 났다. 하지만 그때 아내는 첫애를 가진 상태였으니 엄밀하게 보면 둘만의 여행은 아니었던 셈이다.
강릉 여행 이후 첫애를 낳고 1년 남짓 지나 내 공부 때문에 우리 부부는 프랑스로 떠났다. 6년간의 유학 생활 도중 매년 한 번 정도는 여행을 갔지만, 늘 큰애 그리고 뒤늦게 낳은 둘째와 같이했다. 어려운 형편 탓에 캠핑 수준의 여행이었다. 귀국해서도 방학 때마다 여행을 다녔지만, 어김없이 애들과 같이했다. 심지어 연구년으로 캐나다에서 1년을 머물렀을 때도 가족과 함께 모든 여행을 해냈다. 복기해 보니 아내의 말처럼 정말 단 한 번도 둘만의 여행은 없었다.
아내가 슬며시 말을 꺼낸 것이 혹시 서운해선가 싶어 기색을 살폈지만, 그런 것 같지는 않아 보여 다행이었다. 집 떠나 첫 여행 하는 소녀처럼 마냥 즐거워하는 표정이었다. 내가 “둘만의 여행, 못해 아쉬워?”하고 확인차 슬쩍 물어보니 아내는 “전혀!”라고 대답했다.
그 긴 세월을 애들에만 전념했구나 싶어 아내에게 미안하고 고마웠다. 지금부터라도 우리끼리 좀 다니자 했더니 “뭘 다녀. 나는 밖에서 자는 게 힘들어” 한다. 맞다. 아내는 유별나게 밖에서 자는 걸 힘들어한다. 방학이든 아니든 기회가 있으면 여행을 갔던 것은 애들 때문에 감수한 것이다. 애들 사랑은 역시 엄마다 싶다. 모성애의 크기에 비해 부성애는 비교 불가다.
세 시간 반을 운전한 끝에 점심 무렵 괴산 시설에 도착했다. 이국적인 시설들이 오밀조밀 들어서 있어 마치 고품격 힐링 파크 같은 느낌이 들었다. 구내식당에서 빠르게 식사한 후 아내는 치유프로그램에 들어가고, 나는 인근 건물의 한 카페에서 혼 커피를 했다. 좀 지루해서 시설을 둘러보았다. 알고 보니 카페 옆은 영화관으로 엄연히 개봉작을 상영하는 극장이었다. 누가 오나 싶은데 몇몇 사람이 들어가는 게 보였다. 나중에 아내에게 물어보니 괴산에 극장이 변변찮아 지역주민이나 인근 군사학교 학생들이 찾는다고 한다. 우리가 묵을 호텔도 들러보고, 스포츠센터, 각종 공방, 그리고 개원 예정인 요양병원, 한의원 등의 시설을 탐정처럼 탐사하고 산책로를 걷기도 했다. 그래도 여전히 시간이 남았다.
여섯 시가 되어서야 아내를 만날 수 있었다. 둘만의 저녁 식사를 하고 호텔에 체크인하여 객실에 들어가 보니 아내 말대로 깨끗하고 소담하다. 텔레비전을 보다 낮에 보아둔 호텔 옆 호프집에도 들렀다. 널찍한 실내에 많지 않은 손님들 속에서 여유 있게 한잔하니 시간이 멈추는 듯한 느낌이었다. 둘만 낯선 곳에서 함께 하는 이 느낌을 오래 간직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이튿날 아침 객실 창밖으로 보인 운무(雲霧)가 이국적이었다. 오전의 짧은 프로그램을 끝내고 온 아내를 다시 만나 전날 낮에 홀로 걸었던 산책로를 안내하듯 함께 걸었다. 아내도 좋았던지 다시 한번 오자 했다. 예상치 못한 ‘괴산’ 여행은 지극히 평범했지만 그래서 새로웠다. 아내와 단둘이 한 여행이었기에.